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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기록 Mar 24. 2021

나에게 성남시 분당이란

도시천재 성남시

  



  나는 통영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 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고, 21살에 서울에 올라왔다. 올해 초 성남으로 이사 오기까지 서울을 떠나 본 적이 없었다.  내 고향 마을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산업단지로 결정되어 보상이 이미 끝난 상태였다. 중장비가 들어오면 여지없이 떠나야 하는 입장이라 옛집을 헐리고 개축하거나 정성을 들이는 집이 없었다. 누런 초가집도 드문드문 있었고, 수세식 화장실 하나 없던 고향 마을은 밀레니엄으로 한창 들떴던 2000년 전후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가난하고 내세울 것 없는 고향이지만 그곳에서 보낸 유년 시절만큼은 가장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몇 년에 한 번씩 고향마을을 찾아가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진 마을에 세워진 차가운 공장지대를 바라보노라면 서글픔에 오래 보고 있지 못한다. 차라리 보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그렇다면 내 기억 속의 고향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을 텐데. 이제는 고향을 떠올리면 산과 들을 갈아엎은 땅 위에 세워진 반원 모양의 가스탱크가 오버랩 되면서 기억이 뒤죽박죽 돼버린다. 한글을 깨우치고 나면 깨우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듯이 이미 봐 버린 것을 지우려 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시골아이가 대개 그러하듯 항상 서울을 동경해 왔고, 겉멋이 잔뜩 든 서울에 오고서 얼마동안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황홀했다. 나의 경상도 사투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도록 입단속도 철저히 했지만 가끔 어설픈 서울말 때문에 연변사람으로 오해 받기도 했었다. 버스 안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서울 남학생들의 수다는 그 어떤 음악소리보다 감미로워 그쪽으로 귀를 쫑긋하고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 황홀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서울 변두리 단칸방에 살면서 객지생활의 외로움과 직장생활의 고단함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나날이 휘황찬란해지는 서울이었지만, 더 이상 나에게 매력을 주지 못했다. 각박한 서울생활 속에서 유년시절의 시골향기를 그리워하고 있었지만, 한 번 서울에 발붙인 이상 서울을 떠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웃긴 게 나긋나긋한 말씨의 서울남자랑 결혼하겠다는 앙큼한 꿈도 꾸고 있었다. 10년이 지나 그 꿈은 실현되었다. 

  




  

  서울생활의 제2막이 시작되었다. 결혼을 앞두고 입맛에 맞는 집을 고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전세금으로 계약한 신혼집 아파트는 실망스러웠다. 신문지상에 재건축 기사가 수시로 오르내리는, 낡고 오래된 16평 아파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1980년도에 준공한 이 아파트 외벽에는 지렁이가 지나간 듯 수 많은 균열에 덧칠을 한 시멘트 자국과 현관 입구 양회 캐노피에서는 잡초가 자라고 있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빌딩숲이 저만치 있건만,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이동으로 내가 살아보지도 못한 70년대가 꼭 이랬을 것만 같았다. 재미있는 것은 베란다에 서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90도 돌리면 63빌딩보다 더 높은 으리으리한 타워팰리스가 삐죽 솟아 있고, 다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대모산 기슭에 자리잡은 구룡마을은 낡은 사과상자가 오밀조밀 모여 있는 듯 했다.  내가 어릴 때 살았던 시골보다 딱해 보였다. 마을 입구에는 무시무시한 망루에 걸린 ‘보금자리 보장하라’는 플래카드가 여기저기서 소리 없는 외침으로 펄럭이고 있었다. 한 곳에서 몇 십 년의 세월을 마주하니 ‘나는 누구? 여긴 어디?’라는 철 지난 유행어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래도 사람의 적응력이란 놀라워서 처음에 가졌던 생경감은 다시 느껴보지 못했지만, 답답하고 좁은 집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일 들자 지겨운 서울하늘을 벗어나고 싶었다. 사실 가까이 사는 시댁과도 멀어지고 싶은 솔직한 심정은 쏙 빼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집이 좁다는 핑계도 보탰다. 남편 직장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 갈 집을 알아보면서 팔자좋은 아줌마들의 로망으로 떠오른 경기도 성남 분당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 분당은 서울과 가까운 경기남부로 고급 아파트가 즐비하고 대규모 쇼핑센터며 편의시설이 들어찬 시민이 주인, 자연 친화적인 신도시라 서울 강남과 집값이 비슷했다. 우리가 가진 전세금이 얼마 되지 않아 분당의 중심지는 언감생심이고 분당 초입 야탑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아담한 23평 아파트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매서운 한파가 여전한 2월 초에 이사를 했다. 그 동네의 첫 인상은 볼품없는 가녀린 나무가 듬성듬성 아파트 주위를 감싸고 있었고 그 풍경은 마치 어느 중년 아줌마의 듬성듬성한 정수리를 보는 듯 휑했다.


  

  하지만 곧 봄이 찾아 왔고, 봄기운이 불어 닥치자 아파트 앞 하천 산책로 나무들의 변신이란 환상적이었다. 메마른 가지에서 분홍 꽃망울이 맺히더니 곧 팝콘 기계에서 쏟아져 나온 벚꽃잎이 눈처럼 땅위에 내려 앉았다. 4월은 어서 이 길을 걸어보라 유혹하고 언제 피어야 할지를 아는 대기중인 꽃들은 차례대로 피어올랐다. 온갖 나무와 꽃들로 나날이 풍성해지는 야탑천 산책로는 이 동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길이 되었다. 이 산책로를 따라 20분 남짓 걷다 보면 성남의 줄기, 청둥오리 가족이 한가로이 떠다니는 아름다운 탄천과 만나게 된다. 





  나는 세 살 아이와 이 산책로를 아침저녁으로 걸으며 그 옛날 엄마가 알려 준 꽃 이름도 불러주고 여름이면 장맛비로 씻긴, 깨끗한 하천에서 발을 담구며 놀았다.  난 그 옛날 맹랑한 시골아이가 되었다가 엄마가 되었다가 1인 2역을 잘 소화했다. 여름에 그 푸르름을 떨치던 나무들은 감추고 있던 마지막 카드를 뽑아 들고 저마다의 단풍을 뽐내느라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산책로의 나무들은 그렇게 다채로운 세상을 만들어 주느라 진이 다 빠져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나는 하천의 여린 나목들의 봄, 여름, 가을을 알기에 그들의 초라한 행색을 감히 깔보지 못한다. 그들의 숙면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뻗은 손을 도로 집어넣었다. 어느 새 그토록 목말라하던 나의 향수병도 잠이 든 듯 잠잠하다.













분당을 사랑하는 9년차 성남시민이다. 

우여곡절 끝에 계획에도 없던 분당에 둥지를 틀고 살고 있지만 

어느새 정이 많이 들었다.  

분당은 묘하다. 

성남이면서 물과 기름처럼 나뉘는 성남시와 분당구.


지방에 사는 친구가 나에게 어디 사냐고 물어보면 

'분당에 살아' 

 경기도 성남시도 모르는 지방친구에게 분당을 들먹인다. 

'분당이 어딘데?' 

'천당 밑에 분당' 

'헐~'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판교로 이사가는 사람들에게는 

'축! 판교 입성' 

힘찬 구호가 붙는다. 

판교가 캐슬인가? 

삶이 사다리같이 느껴진다.    

난 겨우 분당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신세고

허세 쩔은 분당이라도

어떻게 해서라도 분당에서 살아남고 싶다.



율동공원 한 바퀴, 2021.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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