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회사에 입사하고 정말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 늦게까지 야근을 했어요. 상사의 지시, 동료들의 부탁이 있으면 그냥 다 했습니다. 회사에서 힘든 줄 몰랐다가 집에만 오면 녹초가 되고 술이 그렇게 마시고 싶어 지더군요. 매주 금요일, 토요일마다 친구들과 술약속을 잡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들이부었습니다.
제가 결혼을 하고 가장 큰 충격은 시댁의 분위기였습니다. 입덧이 심해 차를 탈 수가 없어 한 시간 반 걸리는 시댁에도 가질 못했죠. 그럼에도 시부모님은 무조건 시댁에 와야 한다고 하셨어요. 차를 타고 가다 내가 몇 번을 토하는 모습을 본 시부모님은 괜찮냐는 말 한마디 없으셨습니다. 만삭이 되었을 때, 자리에 오래 앉아있기도 힘들었는데, 시댁에서 명절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8시간을 바닥에 앉아서 전을 구웠어요(아무도 제게 그만하라고 하지 않으셨지요). 출산 후 처음 맞이한 명절에도 하루종일 일을 하다가 아기가 칭얼거려서 아기를 돌보는 제게 시어머니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타박을 주셨어요. 그래도 저는 시부모님이 원하시는 것에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시댁에 갔다 오면 저는 항상 대성통곡을 하고 며칠 동안 우울했습니다.
아이를 키우며 내가 좀 힘들어도, 내가 좀 불편해도, 내가 좀 아파도, 내가 좀 잠을 못 자도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했습니다. 아이들을 보면 사랑스러워야 하는데, 어느 순간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고통'이 더 커졌어요. 아이들을 위해 나의 커리어, 일상, 젊음, 건강.... 나의 많은 것을 포기하다 보니 아이들의 아이다운 행동에도 저는 '억울함'과 '배신감'이 느껴지더군요.
아이가 잠을 잘 안 자도
아이가 방을 어지럽혀도
아이가 울어도
아이의 작은 행동에도
'내가 너희들을 위해 어떻게 했는데!!!
라는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안에서 일렁거렸습니다.
어느 날, 아이들이 저의 소중한 물건을 찢고 낙서를 한 모습에 폭발을 해버렸습니다. 몇 년 동안 참고 참았던 것들이 한꺼번에 뿜어져 나왔어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멈춰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저는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내 마음의 브레이크는 너무 많이 써서 더 이상 사용 불가능한 브레이크가 되어버렸어요. 급발진 상태가 되어버렸죠. 더 이상 분출할 힘이 없어지고 나서야 멈출 수가 있었습니다.
급발진 이후에 제 삶을 돌아봤습니다. 좋은 딸, 좋은 직원, 좋은 며느리, 좋은 엄마. 그놈의 '좋은'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요. 그리고 내가 원하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면 그것들이 억울함과 배신감이 콤비네이션을 이뤄 두 배, 세 배로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사실, 좋은 OO이 되기 위해 억지로 무언가를 하기로 선택한 것은 바로 '나'였습니다. 타인의 인정과 칭찬이 있어야 내가 존재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내가 내 삶의 기준을 타인에게 맡기고 나는 타인이 어디로 가든 끌려가고 거기에 맞추려고 노력하고, 그러면서도 타인을 미워하고 원망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OO으로 보여야만 내 삶이 안전하다고 믿었지만 좋은 OO이 되면 될수록 나는 망가지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프게 했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귀하게 여기는 아이들에게 상처를 준 경험을 한 뒤에 저는 내가 나에게 가장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내가 나를 가장 귀하게 여기고, 아끼고 사랑할 줄 알아야 나의 진심을 알게 되고, 진심으로 일을 하고, 관계를 맺고, 사랑하는 있는 힘이 생깁니다.
제 안에는 여전히 타인에게 좋은 OO이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타인과 관계 맺고 살아야 하는 인간이기에 그러한 마음도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것을 압니다. 나의 생각과 감정과 욕구를 무시하면서 누군가에게 좋은 OO으로 보이고 싶을 때는 제 마음을 돌아봅니다. 제가 제 자신에게 충분한 돌봄과 사랑을 주지 못했다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휴직하기 전과 같이 여전히 회사에서 열심히 일을 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스트레스로 폭음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유를 뭘까 생각해 보니, 좋은 OO이라는 가면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엄청난 에너지를 이제는 덜 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억울함도 배신감도 없습니다. 좋은 OO 가면 유지비용에 쓰던 에너지를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곳에 쓰다 보니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회사에서의 관계가 즐겁고, 일이 재밌습니다. 아이들을 볼 때면 사랑이 느껴지고, 대학원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달리기와 요가를 하며 내 몸을 돌보는 여유도 생겼습니다. 억지가 아닌 나의 진심이 담긴 것들로 하루를 채우는 것이 얼마나 나를 가볍고 신나게 만드는 지를 하루하루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는 엄마 경력을 통해 진심으로 삶을 사는 방법을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