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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 Aug 19. 2024

나는 극성 엄마가 아닌 줄 알았지

내가 나의 삶을 찾을 수 있었던 이유

회사 동료 중에 불안이 많은 분이 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하면 그분은 밑에 있는 직원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호출해서 이게 맞는지 저게 맞는지 하나하나 따져봅니다. 그럴 때마다 직원들은 자기가 맡은 일에 집중하기 힘들어합니다. 그 분의 불안에 덩달아 휘둘려 일이 더 어려워지고,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될 때가 많지요. 저 또한 그분의 불안에 동요가 되고, 우왕좌왕하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저는 가슴에 손을 얹고 호흡을 하며, 그의 불안에 동요가 되지 않고 내가 집중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찾아봅니다. 그 분이 자신의 불안을 온 직원에게 전파할 때마다 스트레스받기도 하지만, 그분에게 연민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첫째 아이는 돌이 되기 전부터 유제품 알레르기가 심했어요. 누군가가 우유를 만진 손으로 첫째 아이를 만지면 아이의 온몸과 얼굴이 퉁퉁 부었지요. 내가 임신 때 건강하지 않은 음식이 먹어서 그렇나, 출산하고 먹은 은 한약이 모유수유를 통해 아이에게 영향이 간 걸까? 하며, 나의 잘못된 선택이 아이 건강을 망쳐버린 것 같아 자책과 후회를 많이 했습니다. 이제 이런 실수는 하지 말아야지 다짐했습니다.


아이 알러지가 심하다보니 어린이집에 아이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면, 받아주는 기관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사를 결심했어요. 아이가 다닐 수 있는 어린이집이 있는 곳으로요. 편리하고 깨끗한 새 아파트에서 구축에 불편한 게 많은 오래된 아파트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게 시작이었어요.


아이의 미래가 엄마인 내 손에 달려있는데, 앞길 창창한 우리 아이의 미래를 내가 망쳐버릴까 전전긍긍했습니다. 아이가 처음 등원한 어린이집은 학비가 꽤 비쌌고, 아이의 어린이집 생활은 어땠는지 잘 모르지만, (사실 다른 어린이집을 보낸 적이 없어서 비교가 불가능합니다.) 저는 더 나은 교육을 아이에게 주고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로서의 어린이집 생활이 녹록지가 않았어요. 부모들과의 관계, 교사들과의 관계 모두요. 아이를 잘 키우고 싶어 하는 마음이 큰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에 갈등이 없을 수는 없었겠지만, 아이에 대한 불안이 높았던 저는 그 상황이 유독 더 힘들었습니다.


그 생활을 견디기 어렵고, 가정에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어서 이사를 가기로 마음먹었어요. 아이의 알레르기는 예전보다 좋아졌지만 그래도 안전한 먹거리가 있고, 아이에게 보다 더 좋은 환경을 줄 수 있는 곳처럼 보이는 곳을 찾았습니다. 그곳은 대안교육을 하는  유치원과 학교가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지만, 깊은 갈등도 있었습니다.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내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은 아닌지, 비싼 학비도 감내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내 삶의 자유는 부모니깐, 내가 선택한 거니깐 없어도 되는 것은 아닌지, 내 삶보다 아이의 삶이 더 우선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을 했었습니다.


"부모가 이런 고통은 참아야 우리 아이가 잘 클 수 있다. 내가 엄마로서 부족한 게 많으니, 성장하는 계기로 삼자."

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한번 그 마을에 있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남편은 힘들어서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 없다고 극심한 반대를 했지만요.


부모로서 희생을 해야겠다는 저의 결심을 친한 지인에게 말을 했을 때, 지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빈, 로빈이 아이의 삶을 살면, 아이는 살 삶이 없어."


아.......

저는 아이를 그저 잘 키우고 싶었습니다. 좀 더 좋은 환경, 좀 더 좋은 학교에서 존중받으며 자라서, 나처럼 방황하지 않고, 상처받지 않고 아이가 자신의 길을 찾아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만을 바랬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그 바람이 불안과 두려움이 되어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이 교육에만 집중하고 있더군요.


아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일까?

라는 물음이 제 안에서 일렁였습니다.


문득 제가 발목을 다쳤을 때의 일이 떠올랐습니다. 발목에 금이 가서 목발을 짚고 생활했는데, 아이들이 공원에 가고 싶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목발을 짚고 공원에 갔습니다. 한겨울이었는데 급하게 나오느라 다친 발에 양말을 신지 않아 발이 시려서 깨질 것 같았고, 공원까지 거리가 걸어서는 가까웠지만 목발을 짚고 가려니 그 길이 길고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이 원하니깐, 아이들을 위해서는 엄마는 이런 것은 참아야 하니깐 하며 그 시간을 버텼습니다. 잘하고 있다고 나를 다독이면서요.


그때는 한창 아들러심리분석을 공부할 때였는데, 아들러심리분석 선생님께서 이 이야기를 듣고

"로빈 님, 사랑(둘째 딸)이가 엄마가 되었을 때, 몸이 아픈데도 자식을 위해서 무리하고 있다면 로빈 님 마음은 어떨 것 같아요?"


그 질문을 듣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울렸습니다.

"내 아이는 나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희생하는 삶이 아니라, 자기 삶에서 진심으로 행복했으면 좋겠다."



내가 아이 삶을 사느라, 내 삶이 사라졌고, 아이 삶도 사라졌습니다. 그랬기에 그때의 저는 전반적으로 "우울"했습니다. 왜 우울한지 몰라서 나 스스로를 비난했습니다. 아이 셋을 키우는 엄마가 그래야되겠냐며 더 잘하라고 더 열심히 하라고, 니가 한 선택에는 책임을 져야하지 않겠냐고 나를 몰아세웠습니다. 저는 행복하지는 않았습니다. 제 삶에는 책임감만 있고, 행복은 없었습니다.


행복하지 않은 엄마, 자기 삶이 없고 자식의 삶을 대신 사는, 불안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엄마와 함께 자라는 아이들이 과연 행복할까요? 삶에서 진정으로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을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 가족은 이사를 했습니다.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와 남편의 행복을 위해서요.

숨이 쉬어졌습니다. 불면증에 시달리고, 항상 피곤하고, 의욕이 없던 제게 평범한 일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운동을 하고, 산책을 하고, 재미난 소설책을 읽고, 잠도 푹 자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 사주명리를 연구하시는 선생님에게 저와 첫째 아이 사주를 물어봤습니다. 첫째 아이가 대안학교를 다녔던 것을 아시고는 선생님은 제게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망칠 뻔했어요. 엄마가 받고 싶은 교육을 아이에게 줬네요. 이 아이는 경쟁을 좋아하고, 공부를 엄청 잘하고 싶어 해요. 좋은 대학에 가고 싶어 하는 마음도 커요. 그냥 가만히 둬도, 공교육에 무척 적응 잘하고 누구보다 공부 잘할 아이예요."


사주명리학 선생님의 말이 100% 맞는 것은 아니겠지만, 저는 이 말을 듣고 엄마로서의 부채감과 죄책감에서 풀려나는 기분이었습니다. 내가 끝까지 대안교육학교에서 버티지 못해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을 주지 못한다는 죄책감이 내 안에 여전히 있었거든요.


그리고, 내가 아이의 삶을 살면서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기보다, 내가 원하는 삶을 아이에게 줬다는 것을 다시 한번 받아들이게 됐지요.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나의 상처를 투사해서 나의 색안경으로 아이들을 바라봤음을 겸허히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인정과 존중이 뒷받침된 사랑을 주는 엄마가 아니라, 나의 상처로 아이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려는 과잉보호를 했던 엄마였습니다.


아이에 대한 과도한 책임감과 아이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내려놓는 연습을 저는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 책임감과 두려움은 오롯이 내 것이기에,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아이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다는 것도 계속 되뇌고 있습니다.


이런 경험을 한 저는, 불안에 떠는 그 동료가 누구보다 이해가 됩니다. 얼마나 두려우면 저럴까? 얼마나 무서우면 저럴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그가 자신의 불안으로 주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좋지 않은 말을 할 때 다른 사람들보다 덜 상처를 받습니다. 그분의 말은 진짜 저의 이야기가 아니라, 불안으로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을 외부에게 투사하는 것뿐임을 아니까요. 그러니, 나에 대한 오해, 나에 대한 비난을 할 때,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그 분을 보며 한 사람이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혔을 때, 어떻게 되는지를 제3자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감사한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내 상처와 불안을 내가 더 잘 다스려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제가 10년만에 복직하고 그 분을 만난 건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이 셋을 키우며 나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가 생기고,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바라는 마음이 커지면서 제 인생에서 가장 거대하고 깊은 두려움과 불안을 만났습니다. 더 좋은 엄마가 되어야 아이가 잘 클 거라는 책임감, 나는 좋지 않은 엄마라 아이의 미래를 망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이 얽히고설켜서 내 삶을 송두리째 잡아 삼켜 버리고, 아이의 삶도 삼켜 버리려 했지요. 누구보다 억척스러운 엄마, 누구보다 아이의 미래가 두려운 엄마였습니다.


극성 엄마로의 삶을 살아본 덕분에 저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내가 느끼는 불안의 원인은 바로 나라는 것.

내가 불안함을 느끼는 한 세상 모든 것에서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

불안하면 누군가를 탓하고 싶지만 불안을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내 안에 있다는 것.

그리고... 내 불안을 잠재우고, 아이들이 자신이 원하는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내게 주어진 지금 여기의 삶에 그저 충실히 사는 것.


극성 엄마라는 경력 덕분에 저는 결혼하기 전보다도 제 삶에 더 충실히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회사에서도 스트레스를 덜 받고, 진짜 내가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들에게만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먼 훗날 제가 이 세상에 없을 때, 아이들이 저를 이렇게 기억해 주길 바랍니다.

"엄마는 삶을 사랑하고, 삶에 충실하고, 우리와 세상 사람들을 존중해 준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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