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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bin Sep 23. 2024

엄마가 되고, 내가 되었습니다.

우리 회사에 부서장님 이하 모든 직원들이 나보다 늦게 입사를 했지만 저의 10년의 휴직으로 많은 후배들이 저보다 높은 직급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제가 10년을 쉬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대한 불만은 전혀 없습니다. 저의 10년에 대해 저는 전혀 후회는 없습니다.


지난 목요일 회사 동료들과 비공식적 회식(부서장님은 빼고)을 했습니다. 기분 좋게 술을 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속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한 분이 제게

"이런 말 해도 되나? 아니다 아니다 안 할게요."

라는 어마어마한 말을 하셨지요. 나는 너무 궁금해서 말해달라고 계속 이야기를 하니, 그분이 저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내가 너무 큰 핸디캡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승진이 안될 거고, 그런데도 일을 열심히 하는 모습이 안타깝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심장이 쿵 했어요. 10년이라는 시간이 정말로 긴 시간이고, 그 시간이 회사 커리어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이야기 듣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아팠습니다. 속상하고, 슬프기도 했습니다. 승진을 못할 거라는 말 때문이기도 했지만, 저의 삶을 '승진'으로 평가받는 것, 사회가 바라는 일반적인 조건으로 봤을 때 내가 부합하지 않는 사람이며, 삶이 도태된 사람으로 보이는 것 같아 안타까웠어요.


진정한 '나'는 없고, 사회적인 기준과 잣대만 존재하는 것이 왠지 억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이 상황을 다 알고 10년 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저는 똑같이 10년의 휴직을 선택할 것입니다.


저는 저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그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뭘까요? 승진을 못한다고 해서, 제가 큰 핸디캡이 있다고 해서 제가 일을 안 하고 싶지는 않아요. 저는 그냥 지금 제가 있는 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열심히 하며 삶을 사는 제 모습이 그냥 좋아요."


제가 글을 쓰는 이유 중에 하나는 직장에서 10년 휴직자가 도태한 사람으로 판단되는 것에 대한 반감일지도 모릅니다. 10년을 아기 키우며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그저 10년을 흘려보낸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열심히 충실히 살았고, 회사에서 배울 수 없는 더 크고 깊은 것을 배웠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의 아이를 양육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재양육하는 시간을 자연스럽게 가졌습니다. 한 아이를 키우는 것은 우주를 품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로 그러했어요. 내가 낳은 존재지만, 내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존재와 어떻게 함께 잘 살 것인지 찾다 보니, 내가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요.


회사의 입장에서는 10년의 공백으로 인하여 나의 업무에 대한 기술은 부족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술은 익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프로젝트를 통해 저의 전 부서장님이 10년의 공백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누구보다 일을 잘했다고 말해주었지요. 회사의 시선을 너머 삶 전체로 봤을 때 저는 10년 동안 삶과 일에 대한 마음가짐과 태도 등 더 근원적이고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저는 회사에서 승진이 요원해졌지만, 그래도 저는 일은 잘하고 싶습니다. 일을 포함한 제 삶에 충실하고 싶으니까요. 저는 어느 때보다 더 일에 집중하고 제 일을 사랑하게 됐습니다. 승진이나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일에 대한 순수한 마음이 제 안에 있게 되었으니까요. 이것도 사실 아이를 키우면서 배운 것입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 대가 없는 사랑은 아이 셋 10년의 육아를 통해 배우게 되었거든요.

 

저는 입사초기에 초고속 승진에 대한 열망으로 활활 타올랐던 욕망녀였습니다. 매일 경쟁의 연속이었고, 누구보다 더 뛰어남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사회적 가면을 두껍게 쓰고 나의 부족함을 숨기려 애썼습니다. 매일매일 몸과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는 회사에서 인정받을지 몰라도 저는 제 삶에서는 너무나 불행했어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지만 나는 없었습니다.


저는 회식에서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도 생각만큼 큰 상처받지 않는 저를 보고 놀랬습니다. 제 삶의 기준이 어느새 변해서 승진이 아니고, 내게 오는 것들에 대한 충실함이기 때문에 그 말이 제게 큰 영향이 없었습니다. 소위 사회의 기준에 제가 맞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회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소중한 것들을 놓치며, 진실로 중요한 것들을 잊으며 살고 싶지 않습니다.

 

사회적 기준, 남들이 보는 기준에서는 제가 도태되어 보일지 모릅니다. 사실, 과거에 회사에 많은 것을 쏟아부었을 때에도 저는 자신이 도태되어 보였습니다. 다들 나보다 더 많이 인정받는 것 같고, 빨리 승진하는 것 같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끝이 없고, 미래가 불안했습니다. 타인의 시선, 사회적 기준은 어떻게 해도 채우는 것은 불가능했거든요.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항상 쫓아가는 삶, 채워도 채워도 허기가 지는 삶을 살 때에는 불행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상처받았습니다.


육아휴직을 처음 했을 때도 너무 불안했습니다. 이 세상에 내 자리가 없는 느낌이었어요. 뭔가를 이뤄내야 이 세상에 내 자리가 있을 것 같은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는 이 세상에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았어요. 아이를 키우면서도 내가 좋은 엄마, 잘하는 엄마, 멋진 엄마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압박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육아경력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아이 셋의 모습을 지켜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매일매일 체험했습니다. 수많은 책에서 나왔던 말 "존재만으로 충분하다"는 이 문장. 아무리 읽어도 도무지 이해가 안 가던 이 문장을 저는 육아를 통해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타인에게 어떻게든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노력했던 30년 넘는 시간. 그리고 그 기준을 채우지 못해서 나 자신을 자책하고, 타인이 내게 한, 사소한 말 한마디에 슬퍼하며 내 안에 오래오래 남아있던 상처들이 치유된 시간이었습니다. 항상 잘해야지, 항상 뭔가를 이뤄내야지... 하며 압박감에 시달려서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저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고, 저를 치유하며 내 삶에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진짜 내게 중요한 것에 집중하는 힘이 저절로 키워졌습니다.


아이 셋을 키우며 코치 자격증을 따고, 아들러심리분석가가 되고, 강의와 아들러심리분석을 하고, 온라인 강좌를 녹화하는 등... 즐겁게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하나하나 해나갔습니다.


제 삶의 기준은 그냥 지금의 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태라는 것이 없지요. 쫓아갈 사람도 직급도 그 무엇도 없습니다. (물론 저는 종종 제가 원하는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분들을 보면 배가 아프고 질투가 일렁이기도 합니다) 남들이 내게 하는 말도 큰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기준으로 말을 하며, 사람들을 판단하기 때문이고 그 누구도(그 말을 하는 본인조차도) 그 기준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눈에는 내가 부족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저는 누군가의 눈을 채우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니까요. 누군가의 비난과 비판이 두려워 억지로 일을 하기보다, 저는 제가 좋아서 일을 합니다. 한 번만 주어진 유한한 내 삶을 정말로 나에게 좋은 것으로, 정말로 나를 행복한 것을 채우고 싶습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나의 마지막 날숨에 여한이 없도록요.


엄마가 되어서야 저는 비로소 제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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