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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친테이블 Dec 11. 2020

술집 말고 집술

술꾼들의 그로테스크한 계산법


술꾼들의 이야기를 몇 자 적어보려 한다.

내가 좋아하는 두 술꾼님이 있다. 두 술꾼님들은 둘이서도 먹지만 가끔 내가 합류해서 두 술꾼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서로에게 할 수 없었던 말이 내게 전달되면 두 술꾼은 눈이 풀리고 오해도 풀리고 첫잔을 따를 때보다 다정한 모습이 되어 있다.

두 술꾼이 혹시 나를 좋아한다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술만 마시고 있는 내가 적잖이 큐피트의 화살까지는 아니어도, 감히 고해성사를 듣는 신부님의 역할까지는 아니어도, 진솔하게 감정을 털어놓게 만드는 약간의 편안함이 내 매력 포인트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 편안함은 또한 어디까지나 두 술꾼들이 따라주는 술잔을 거절하지 않는 나의 포용력과, 다음 술자리때에도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끄러울 것이 없게 만드는 내 뻔뻔함에 있다. 무엇보다도 술이 취하기 직전 즈음, 새롭게 듣는 그들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매번 술자리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래퍼토리였음을 확인하게 되는, 술꾼들의 이야기를 뇌에 새기지 않고 술잔에 새기는 나의 에티튜드가 술꾼들과의 지속적으로 술자리를 이어가게 한다는 걸 알았다.

멋지지 않는가. 술자리의 모든 담화와 사건을 뇌가 아닌 술잔에 새기고 그 마저도 알콜의 농도와 함께 희석했다가 배설해버리고 마는 초깔끔함!


술꾼님들과 술집에서 술을 마시면 조금 무서운 일들이 벌어진다. 웬만해선 술집의 술은 동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술은 술술 들어가고 우리의 테이블 위로 술병은 빈 병이 되어 나뒹군다. 거기에 그 술집만의 이벤트가 더해지면 무한대로 빠진다. 가령, 전자 다트 내기라든지, 몇 시 이후 주류 50%할인이 붙으면 여기서 안 마시는 것은 여태 마신 것을 모두 손해보게 하는 행위라도 되는 듯이 무섭게 달려들었다. 저녁을 먹으며 천천히 비운 댓병의 소주병들은 9시 이후 타임 이벤트를 만나면 한 시간에 3,4병의 기록을 세운다. 전자다트 내기도 그랬다. 오만원짜리를 현금으로 바꿔 현질을 하며 다트를 던지다 보면 사장님의 황태 안주가 우리 테이블 위에 놓이곤 했는데, 재밌게 내기 다트를 했을 뿐인데 서비스 안주가 생겼다고 이런 공짜를 어떻게 사양하냐며 행복해 하곤 했다. 평소의 그들은 사리분별, 계산, 이성, 정의, 판단의 만렙을 달리지만 술꾼으로 돌변했을 때의 계산법은 그로테스크한 면이 넘쳤다. 그렇게 술집에서 영업시간이 끝나갈 즈음까지, 다음 날을 위한 숙취해소제를 필수코스처럼 챙기고 나올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면 나는 집 앞까지 간 기억을 상실했고, 아침이면 무릎에 바이올렛 컬러의 호떡만한 멍이 전날의 파이팅을 짐작하게 만들 뿐이었다.


집술은 술집 보다 덜 무서울 거라고...... 생각했다. 우연히 술자리에서 보드카가 궁금하다고 이야기했었다. 두 술꾼님은 두 술꾼님들이 좋아하는 앱솔루트와 앱솔루트 만다린을 각각 사들고 나를 초대했다. 한 잔은 탄산수와, 한잔은 직접 착즙한 오렌지 원액과 희석하여 마셨다. 술꾼님들이 고집하는 보드카 스타일을 내게 권한 거였다. 그렇게 두 병의 보드카는 택배로 공수한 엄청나게 긴 다리를 가진 대게 안주와 함께여서 황홀하기까지 했다. 여기까지도 융숭한 대접에 어쩔 줄 몰랐는데, 이어서 엑스레이티드가 등장했다. 처음 보는 술이었다. 이름도 색깔도 참 섹시하여라. 주류 매장에서 7만원에 이 술을 득템했다는 술꾼님은,

"이게 술집에서 마시면 20만원이야."

이런 멘트는 술꾼들의 가슴에 불을 지핀다. 돈을 쓰면서 돈을 버는 기분을 만끽하며 술을 마실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배달시킨 대게와 보드카 두병, 엑스레이트까지 집에서 마셨으니 오늘 우리 얼마 번거야?"

술꾼님이 기분 좋게 한 번 더 강조해주었다.

"엑스레이트만 해도 14만원을 벌었어요, 우리."

나는 더 이상의 계산은 불필요하다고 느낀다. 딱 한 병만 두고 봐도 집술을 선택했기에 14만원을 벌었기 때문이다.

이 날 술자리는 보드카 두병 엑스레이트 한 병을 비우고도, 블랑 캔맥주 여섯개, 처음처럼 한 병까지. 집술 김냉의 술이 바닥이 나고서야 끝이 났다.


술집의 매력은 마셔도마셔도 바닥이 나지 않는 술에 있고, (그러나 지갑은 달까지 바닥일 수도)

집술의 매력은 마시면 마실수록 돈을 벌고 있다는 그로테스크한 계산에 있다. (그러나 지갑은 어쨌든 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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