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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난희 Oct 14. 2021

지금 내 나이가 참 좋다

친구들과의 셋째 날, 마지막 날이었다. 우리가 묵은 영암군 군서면 구림마을의 목원당 한옥펜션에서 아침에 눈을 떴다. 그대로 누워 친구들을 어디로 안내해야 영암이 인상적으로 남을지 머리를 굴려보지만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스마트폰으로 검색도 해보았지만 마음 가는 곳은 없다. 자연스레 발길 가는 대로 가리라 마음먹고 아침 산책에 나섰다.

구림마을은 길심씨네서 5km 남짓의 거리에 있지만 제대로 둘러본 적은 없다. 원님 덕에 나발 분다고 친구들 덕분에 둘째, 셋째 날 아침 산책으로 연 이틀 한옥마을 골목골목을 누볐다. 구림마을은 역사의 고장답게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백제 왕인박사가 1600년 전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문물을 전수하기 위해 일본으로 배를 타고 떠났던 곳, 바로 상대포에 조성된 상대포역사공원을 산책하고 코로나로 문이 닫혀 있는 영암군립 하정웅미술관 등은 다음을 기약을 해야만 했다. 


목원당에서 대충 아침을 해결하고 친구의 제안으로 월출산의 천황사로 향했다. 중. 고교시절 소풍을 간 적은 있었지만 크게 내게 와닿지 않은 곳이었다. 절터만 있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다. 결혼 후 큰 아이 어렸을 적 구름다리까지 가 본 것이 월출산과의 마지막 인연이었다. 월출산의 한 자락 아래의 마을에 살았고 일 년에 몇 번씩 길심씨네를 다녀갔지만 산에 오를 시간과 여유는 없었다. 자고로 등잔 밑은 어두운 법이니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도 옛말, 이젠 하루가 다르게 변하니 20여 년 만에 찾은 월출산 천황사로 가는 길은 입구부터 모든 것이 달라져 있다. 이미 오래전에 달라지고 그 달라진 흔적도 오래되어 보였다. 우리는 일단 천황사까지만 가기로 했다. 제법 높은 곳에 자리한 천황사에 도착해서 산세를 우러르니 우뚝우뚝 솟은 비상한 바위와 바위 사이에 걸쳐진 주홍빛 구름다리가 보였다. 자연스레 구름다리까지 가보자는 욕심이 절로 생겼다. 

자연을 둘러싼 환경은 변했을 테지만 산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을진대 내 눈에는 산세도, 바위도 모두 변한 듯이 보였다. 이것은 나의 자연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음 일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모든 자연이 달리 보인다. 지금 50대가 여행하기 참 좋은 나이다. 남편과 아이들을 두고 시골 길심씨네에서 잠시 시골살이 중이지만 걱정은 없다. 다 제각기 갈 길을 잘 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 나의 황금기인 셈이다. 


구름다리까지 등산길이 잘 닦여 있다. 예전의 네 발로 기다시피 올라갔던 길이 아니다. 잘 놓아진 계단을 오르고 난간 손잡이를 잡고 가파르지만 어렵지 않게 올라갔다. 구름다리에 도착할 무렵 내려오던 한 등산객이 내 신발을 보고 말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올라오셨나 봐요."

나는 여름 젤리슈즈를 신고 올라갔다. 깜박하고 운동화를 차에 두고서 말이다. 그럼에도 마음만 다소 신경이 쓰였을 뿐 그다지 발에는 무리가 없었다. 

구름다리에 오르니 경치가 장관이다. 건너려는 구름다리 뒤 아래로 보이는 바둑판처럼 잘 경지정리가 된 들판은 가을이 익어가면서 누런 연둣빛이었다. 멀리로는 구름 아래 금정면 활성산의 풍력발전기가 조금 과장해서 바람개비처럼 보였다. 근간에 들어서 가장 높은 해발고도 605m 지점에 오른 셈이라 더 뿌듯했다. 예전에 출렁거렸던 걸로 기억되는 다리는 단단해 보였고, 길어 보였던 구름다리의 길이는 짧아 보였다. 이전의 노후화된 구름다리가 철거된 후 2006년에 재개통된지도 오래전인데 등잔 밑이 어두워 이제야 오른 것이었다. 친구들이 오지 않았다면 나는 이후로도 언제 등잔 밑에 불을 밝혔을 것인가. 감회가 새로웠다.


 월출산의 가을바람이 구름다리를 잘 건너도록 나를 밀어주고 안아주었다. 다리 중앙에 이르니 출렁거림이 살짝 느껴져 간이 쭈그러들었다. 다리 건너에 자리한 테이블 의자에 앉아 바라보는 기암괴석과 자연경관이 어우러진 풍광은 나의 마음을 부풀게 했다.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풍경이 보이고 그 아름다움에 반했다. 이제 제대로 자연을 즐길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일까. 그래서 지금 내 나이의 50대가 참으로 좋아진다.

한참을 앉아서 월출산을 감상하고 다시 구름다리를 건너 올라왔던 길로 내려왔다. 계단이 가파른 탓에 올라올 때 내려갈 것을 걱정했던 것은 기우였다. 투두둑 상수리나무에서 상수리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고 날쌔게 숲으로 달아나는 다람쥐도 만났다.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는 구름다리를 올랐을 뿐인데도 우리는 한마음으로 무언가 하루를 알차게 보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친구들이 월출산의 아름다운 풍경을 가슴에 가득 안고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오를 수 있게 되어 그지없이 행복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월출산의 아름다운 풍경이 이제 눈을 감아도 보인다. 


 서울로 가는 버스가 사라지고 영암 읍내로 차를 몰아 케이크와 치킨을 사서 길심씨네로 다시 돌아왔다. 수 십 년 만에 월출산 구름다리에 오른 날은 바로 내 생일이었다. 이제 진짜로 한 살 더 먹게 되지만 지금 내 나이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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