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갈 일이 생기면 성수씨, 길심씨는 당장 옷을 갈아입고 앉아 날 눈으로는 좇으며 입으로는 몇 번씩 재촉을 한다. 오늘도 길심씨는 아침을 먹자마자 한의원에 가자고 목소리를 높인다. 급할 것도 없고 예약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니건만 해야 할 일을 앞에 두고는 안절부절이다. 나는 시간을 정한다.
"엄마, 9시 40분에 나가네잉. 9시 40분! 알았제."
이렇게 단단히 못을 박아 두어야 한다. 그래야 뒷탈이 없다.
이러고 나니 길심씨는 느긋하게 빨래를 주무르고, 마당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손질을 한다. 나는 설거지를 하고 나갈 준비를 한다. 그러고도 길심씨는 시간이 되기 전에 마당을 나가 고샅길 끝의 차 옆에 앉아 소나무를 바라보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정한 시간이 되지 않았기에 입 밖으로 재촉의 말은 꺼내지 않는다.
지난여름 시골살이 중 초반에는 외출을 할 때면 부모님도 나도 옥신각신 목소리가 커졌다. 어디를 가든 마을 밖으로 나가려면 내 차가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계속 가자고 재촉을 하고 나는 조금 있다 가자고 기다리라 하고 목소리를 키웠다. 그러다가 시간을 정해 알려드린 이후부터는 불협화음이 없어졌다.
부모는 늘 한없이 기다리는 존재다. 나도 서울에선 내 아이들이랑 같이 외출할 때면 기다린다. 남편은 더 빨리 준비하고 기다린다. 그러나 우습게도 여기서는 부모님이 늘 날 기다린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자식은 자식이고 부모는 부모인 것이다. 부모님과 시골살이 중 가끔 나는 깜짝 놀란다. 내 나이가 얼마인데 부모님 앞에서는 나이도 잊고 자식이 된다. 아침에도 내가 늦게 일어나면 두 분은 기다린다. 내가 서울에서 아이들을 기다리듯.
부모는 자식이 태어나 옹알이를 하면 뒤집기를 기다리고 뒤집기를 하면 기어 다니기를, 또 서기를, 또 걸어 다니기를 기다린다. 아기 때는 그때가 되기를 소리 없이 기다리지만 커가면서는 욕심을 가지고 기다린다. 욕심이 들어간 기다림은 그 기다림이 바람으로 변해서 자식을 힘들게도 한다.
어제는 구림마을에 있는 '월요 카페'에서 글을 썼다. 내가 딱 좋아하는 스타일의 카페였다. 밭 가운데 홀로 서있는 한옥카페로 음료 맛도 좋고 분위기도 깔끔하고 정원의 푸른 잔디도 감나무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엊그제 다녀간 친구들이랑 이 카페를 같이 못 간 것이 못내 아쉬울 만큼 훌륭했다. 마음 편히 글을 쓰다 보니 벌써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서둘러 돌아와 고샅길에 주차하는데 휴대폰 벨이 울렸다. 길심씨였다.
방에 들어서니 성수씨가 한 걱정을 하며 기다렸다고 길심씨가 성수씨를 놀린다. 부모는 어쩌면 자나 깨나 자식을 기다리는 존재다. 지난여름 길심씨의 팔순 기념으로 흑산도 여행 갔을 때도 아침 일찍 일어난 부모님은 딸, 사위들이 일어나길 기다리고 우리는 또 우리 아이들이 일어나길 기다렸다. 어쩌면 부모는 젊어서도 늙어서도 한없이 자식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존재다. 오늘 밤에도 길심씨는 자다 깨서는 내가 빨리 자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