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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난희 Nov 15. 2021

'게미'가 있어야지

내가 사는 곳 근처 재래시장에는 좁은 점포에 트럭을 창고 삼아 과일, 야채 장사를 하는 아저씨가 있다. 점포가 좁아서 길가에 세워 둔 트럭이 창고인 셈이다. 시장을 갈 때면 나는 으레 이곳에서 과일을 산다. 밖에 내놓은 좌판에는 바구니들이 줄을 서 있고 늘 손님들이 과일을 고르고 있다. 요즘에는 단골들이 많이 생겨 부부가 같이 하는지 아주머니가 팔고 아저씨는 안쪽에서 박스를 챙긴다.


나는 오래되어 좋은 시기를 놓친 시든 과일은 사지 않지만 못생기고 흠이 있는 과일은 집어 든다. 못생기고 흠이 있다는 것은 자연에 방치되어 돌봄을 받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바람을 맞아 표면이 거칠고 벌레가 먹어 보기 흉한 과일이 더 맛이 있다. 더 맛있는 것은 벌레가 더 잘 안다.  보호를 받지 못해 외모가 보잘것없고 크기도 다소 제각각이지만 속은 튼튼하고 야무지다.


지난 초가을 길심씨네에 갔을 때 태풍에 가지가 얼마나 호된 바람을 맞아 부대꼈는지 껍질에 하얀 흉터가 크게 생겨 있었다. 바람의 크기가 짐작이 갔다. 길게 자라면서도 한 번 생긴 흉터는 없어지지 않았다. 이 못생긴 가지를 따다가 요리를 하니 부드럽고 연약한 가지보다 훨씬 식감도 좋고 맛이 좋았다. 시골에서 자란 덕에 못생겼어도 속이 찬 과일이나 야채를 보는 눈이 있다. 특별한 팁은 없지만 나만의 직감이다.


상품성으로 따지자면 번들번들 윤이 나고 크기가 고르고 큰 과일이 보기가 좋고 맛도 좋지만 나는 이런 과일들에서는 자연의 맛을 덜 느낀다. 왠지 싱거운 맛이 느껴지기도 하고 당도가 높아 단맛은 있지만 고향에서 쓰는 말로 치자면 게미가 없다. 이건 순전히 나의 생각일 뿐이지만 말이다. '게미'는 네이버 어학사전에서 찾아보면 '씹을수록 고소한 맛, 그 음식 속에 녹아 있는 독특한 맛'으로 전라도 방언이라고 나온다. 내 고향 시골에서는 '게미'라는 말을 동네 어른들은 자주 사용한다. 나는 그 속뜻을 잘 알지만 혹자는 모를지도 모르겠다.


맛은 있지만 흠이 있어 상품성이 떨어지니 가격은 대체로 착한 편이다. 때로는 흠이 없는 과일도 다른 가게에 비해 훨씬 싼 편이라 시장에 가면 꼭 이곳을 들르곤 한다. 단골가게가 정해져 있으니 다른 곳을 들를 필요도 없고 선택지가 없는 셈이니 시간도 절약된다. 굳이 따지자면 맛, 가격, 시간적인 면에서 일석삼조인 셈이다.


요전엔 퇴근길에 단감 한 봉지와 귤 한 박스를 샀다. 내가 좋아하는 단감은 크기가 고르지도 않고 바람상처를 입어 예쁘지는 않지만(내 눈엔 예쁘다) 아삭아삭해서 맛이 있었다. 흡사 내 고향 시골 텃밭의 감나무에서 따 온 듯했다. 사람이나 과일이나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사귀어 봐야 알고 먹어봐야 안다. '게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디 시장통의 그 과일가게가 오랫동안 번창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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