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초 Joe Cho Feb 14. 2024

이게 진짜 나마비루

2018년 1월 홋카이도 로드트립 ep.1

 한겨울 삿포로의 밤은 한국보다 빨리 찾아온다. 삿포로에 도착해 호텔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오니 해는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어둑해진 거리를 20여 분 걸으니 오래된 벽돌 건물과 높은 굴뚝이 보여 그리로 향했다. 삿포로 맥주 박물관이다.


 삿포로 맥주는 일본에선 개척사라고 부르는 시대인 1876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선 운요호 사건으로 불평등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됐던 해에 삿포로에선 맥주 공장이 지어졌다. 가고시마 태생의 사무라이 무라하시(村橋)는 런던 대학 유학 후 홋카이도로 돌아와 농업과 근대 산업의 진흥을 꿈꾸었다. 맥주는 당시 농업과 산업이 융합할 수 있는 가장 근대적인 아이템이었다. 그때의 삿포로는 시장도 인프라도 없던 시절, 이런 상황에서 맥주 공장을 짓는다는 건 꽤 위험한 모험이었다. 무라하시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오히려 맥주 공장을 지으면 관련 시설과 교통 등 도시의 근대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에 독일에서 맥주 양조를 배운 나카가와 세이베이가 합세해 지금의 삿포로 맥주 기틀이 다져졌다. 애초 나무로 지어졌던 공장 건물은 점차 지금의 벽돌 건물로 증축되었다. 이 건물은 홋카이도의 개척사를 상징하는 근대 유산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실제 공장은 현대화돼 이전했고, 이 지역은 도시 재개발과 더불어 1993년 '삿포로 팩토리'로 다시 태어났다. 삿포로 맥주의 과거 상표 모습을 보면 지금과 약간 다르지만, 보리가 별을 둘러싼 콘셉트는 아직도 이어져 오고 있다.


 삿포로 팩토리는 과거 공장이 있던 부지에 지어진 대형 복합 상업 시설이다. 총 7개 건물에 160여 개의 상점과 레스토랑이 모여 과거의 유산을 기념하며 전하고 있다. 검고 긴 굴뚝은 이 지역의 랜드마크가 됐다. 안쪽엔 실제 양조에 쓰였던 시설과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물로 작은 박물관을 꾸며놓았다.


 한쪽엔 신선한 맥주를 시음할 수 있는 곳도 있다. 여기까지 왔으면 꼭 맛봐야 하는 것이 바로 '삿포로 클래식'이다. 다른 캔맥주야 한국의 편의점에서도 흔하게 구할 수 있지만, 이 삿포로 클래식은 오직 홋카이도에서만 마실 수 있다. 이름 그대로 120년 전에 만들었던 레시피로 제조해 헤리티지를 잇고 있다. 클래식 말고도 다양한 종류의 맥주를 시음해 볼 수 있다. 가격은 2018년 1월 당시 단돈 250엔.


 그래도 나의 선택은 클래식. 이거 맛보러 굳이 여기까지 찾아오는 여행객들도 있다는데. 삿포로 맥주는 개인적으로 아사히 맥주랑 비슷하게 느껴진다. 부드럽고 깔끔한 청량감이 특징이다. 여기에 클래식은 기교를 덜 부린, 좀 더 드라이한 맛이다.


 에비스(YEBISU)도 삿포로에서 만든다. 삿포로보단 좀 더 비싼 고급 제품군에 속한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카츠라기 미사토가 즐겨 마시는 맥주로도 나오는데, 실제로 산토리 프리미엄 몰츠와 비슷한 프리미엄 맥주다. 맛은 삿포로 클래식과 달리 진하고 단 편이다.


 술은 술을 부른다. 삿포로 팩토리 벽돌관 1층엔 과거 공장 터널을 리뉴얼한 레스토랑이 있다. 상호는 ビヤケラー札幌開拓使. 총 550석이 있는 대형 비어홀로 이곳에선 한정판을 비롯한 10종의 삿포로 맥주를 마실 수 있다. 삿포로 맥주는 그 특유의 청량감 덕에 고기 요리와 잘 어울리는데, 삿포로에선 칭기즈칸 스타일의 양고기에 주로 곁들인다. 하지만 나의 선택은 홋카이도 새우 회. 바로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숨이 붙어 있던 녀석들이라 꽤 싱싱한 맛이 났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팩토리 건물 안쪽으로 향했다. 그곳에선 어떤 여가수가 겨울밤에 어울리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고대 시대부터 빵집 옆엔 맥줏집이 있었다. 빵과 맥주의 기본 성분은 같고 효모의 발효가 필요하다는 것 또한 같다. 결과가 다를 뿐. 맥주는 깨끗한 상하수도 시스템이 생기기 전에 안전하게 수분을 섭취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수천 년간 인류의 희로애락을 담기도 한다. 맥주는 인류의 문명과 꽤 오랫동안 궤를 이루어왔고, 어떤 나라에선 맥주 양조 규정을 엄격하게 관리하기도 한다. 어쩌면 삿포로(City)가 개척되기 위해 삿포로(Beer)가 꼭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윽고 오로라를 보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