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틴슨의 얼굴에 대한 지극히 사적인 소고
이번 글은 취향 공유 매거진 NERD 7호 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하이틴 스타
배우에게 있어 가장 매력적인 동시에 떨쳐내기 힘든 주홍글씨 같은 단어. 두 세대 정도를 거슬러 올라가면 소피 마르소의 라붐이, 그 이후에는 브렛 팩 일원 중에서는 에밀리오 에스테베즈의 조찬클럽이 머릿속을 불현듯 스친다. 스친다는 말처럼 그들의 얼굴은 간신히 떠올려야만 될 정도로 더는 보이지 않는다. 하이틴 스타들은 청춘을 소진해 아이콘으로 자리 잡기 쉽지만 그만큼 그 인장을 벗어나기가 어렵기에, 그들의 커리어는 정상에 쉬이 올라오고 또 쉬이 내려가기를 반복한다.
Robert Pattinson
2000년대 후반으로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나와 청소년기를 공유하는 세대들에게 그는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에드워드로 기억된다. 그가 올해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 (2020)’의 닐로 상업 영화에 다시 등장하고, 또 새로운 브루스 웨인의 자리를 찬탈하며 상업영화계의 중심으로 돌아오기까지 걸린 10여 년간의 시간 속에서 그를 여전히 따라다니는 그림자. 에드워드.
After the Twilight
패틴슨은 그 인장을 간절히 지우고 싶었던 것 같다. 그가 찍었던 영화의 제목처럼 해가 지고 난 이후, 대중들의 인기를 영위하려는 해를 쫓으러 가기보단, 그는 밤의 시간을 맞이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주류 영화계로부터 떠나온 이 시기가 나에겐 그의 연기를 사랑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나는 그가 브루스 웨인으로 기억되기 전에, 그로부터 서둘러 에드워드의 인장을 지우고 싶어졌다.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이 배우를 구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여기 소개될 네 편의 영화들을 나와 함께 지나온다면 필히 그를 에드워드도 브루스 웨인도 아닌 그의 본명으로 기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매혹된 자의 상승하는 추락, 추락하는 욕망 - 수직선 위에서
28살의 젊은 나이, 금융경제의 정점에 있는 억만장자 에릭 파커. 패틴슨이 분한 이 캐릭터를 위해 감독은 요새와 같은 리무진을 제공하며, 그 리무진 안으로 자본에 종속된 사회의 모든 분야를 대동한다. 리무진 안에서의 하루를 다룬다는 점에서 같은 해 칸에서 경쟁으로 맞붙었던 레오 까락스의 ‘홀리 모터스 (2012)’를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후자의 영화가 삶-영화의 환유법에 대한 방사형의 운동이라면, 코스모폴리스는 원이 아닌 수직선이다. 자본에 올라타 세상을 다스리던 그가 탄 리무진이 파괴되고, 하차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은 해체되며 추락한다. 리무진 밖에선 마르크스의 전언을 비튼 ‘자본주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한다는 문구’가 부유한다. 자본의 정점으로부터 미끄러지듯 전 재산을 날린 파커의 하루를 포착할 때, 여러 요소를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 몰락을 목도하는 패턴슨의 얼굴을 이야기하고프다.
자본주의의 유령이 떠다니는 작금의 세계에서 정점에 있는 그마저 그 유령에 매혹되어있다. 그리고 그 매혹의 이미지는 두 번의 섹스와 섹스를 암시하는 장면, 그리고 성취되지 못한 아내와의 섹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러나 어딘가 이상하다. 파커는 이 모든 섹스에서 상대를 응시하지 못한다. 단순히 측면 쇼트를 찍는 크로넨버그의 연출법 때문이 아니다. 그의 얼굴, 시선의 소실점에는 맞은 편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여정은 분명히 수평적인데, 그의 초점은 명백하게 수직적이다. 추락하는 존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총탄이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존재가 쉬이 총구를 겨누지 못하듯, 그의 시선은 대상을 바라보는 데 실패한다. 코스모폴리스의 수평적 전개를 수직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것은 명백하게 패틴슨의 눈이며,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코스모폴리스의 매혹이 자본이라는 추상성이라면, 애거스의 라이트하우스는 보다 직관적인 매혹을 그리고 있다. 쫓겨오듯 당도한 낡은 등대에 신참 등대지기 윈슬로우로 분한 패틴슨은 다시 한번 수직으로의 매혹을 보여준다. 명징할 정도로 프로메테우스 신화와 북유럽 신화 그리고 사이렌 이야기를 교배시킨 이 영화에서 그의 매혹은 하강함에서 비롯되지 않고, 상승함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리고 매혹됨을 담아내는 패틴슨의 눈은 다시 한번 진화한다.
등대에는 늙은 등대지기 (아비이자 신적인) 토마스와 윈슬로우 뿐이다. 비린내가 진동하는 등대에서, 아버지의 규율은 절대적인 복종이며, 등대의 빛을 관리할 수 있음에서 그 권위가 나온다. 이에 반기를 들려는 윈슬로우의 매혹은 사이렌처럼 보이지만, 그 저변에는 섹스와 죄의식 그리고 권력욕이 자리 잡고 있다. 수직적 매혹은 동일하나, 그 대상에는 이제 등불이라는 물성이 부여된다. 인어 조각상을 손에 얹고 자위를 하는 쇼트에서마저 그의 시선은 위를 향한다. 매혹의 위치를 집요하게 쫓는 눈은 혼란으로 뒤덮인 상태에도 고정되어 있다. 끝내 그 매혹을 마주하는 순간에 추락하는 이카루스처럼, 패틴슨은 끝내 오르길 원하는 욕구의 산화점까지 질주하며, 상승으로부터 작렬한 추락은 그의 시선으로부터 온다.
질주하는 자의 소멸, 부유하는 자의 구원 – 수평선 위에서
도발적이고, 급진적인 템포로 내달린 20분간의 하이스트와 도주 그리고 붙잡힌 채 피를 흘려 쓰러지는 동생의 육체를 지나서야 영화는 비로소 시작을 알린다. 모든 오프닝 크레딧이 지나간 그 자리에는 체포당한 동생을 꺼내려는 코니의 정면 쇼트가 자리한다. 그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여자친구의 집에 찾아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집요한 질주는 코니와 카메라 모두에게 해당하는 표현이다. 이 질주의 목적지는 결국 구원에 성공하느냐, 아니면 허무하게 소멸하느냐는 두 가지 갈림길뿐이다. 코니는 길에 내던져졌고, 이 직선적 운동에는 정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코니를 연기하는 패틴슨의 얼굴은 수척하다. 앞서 이야기한 두 영화의 얼굴이 매혹이라면, 코니의 얼굴은 생존이다. 동생과 영위할 정상의 삶을 탈환하기 위한 비정상적 질주에, 우연적인 인물들 (크리스탈과 레이)는 일시적으로 함께하지만, 끝내 이들마저 퇴로 없는 여정에서 소거 당한다. 코니와 닉으로 시작했지만 코니가 세 번의 연이은 소거를 경험할 때에, 이 영화의 목적지는 두 가지에서 한 가지로 좁혀짐을 안다. 내내 그의 곁을 집요하게 맴돌던 카메라가 언제 그에게서 떨어져 부감으로 그를 잡는지를 기억하자. 이 영화의 마지막인 코니의 퇴장에서 우리는 생존을 위한 패틴슨의 절박한 얼굴을 지켜봐야 한다. 한 대의 카메라와 한 명의 인물 그리고 그사이의 하나의 벽. 이 순간 패틴슨은 단순한 생존의 절박함이 아닌, 하나의 계급, 하나의 사회, 하나의 부조리에 대한 커다란 환유가 된다.
클레르 드니는 우주를 찍을 관심이 없었고, 차라리 그 우주라는 공간으로부터 새로운 생존을 다룰 신화를 쓸 생각이었다. 이미 목적지를 상실한 채 부유하는 우주선에서, 그 안에 놓인 인간의 유일한 운명은 생존이다. 이미 굿 타임에서 생존이라는 욕구로부터 사회라는 환유를 도출해내는 얼굴을 보여준 패틴슨은, 어쩌면 주류 영화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장르를 비틀 생각이었던 드니의 연출에 가장 중요한 키였을 것이다. 생존을 위한 표류는 그 존재 자체의 생존을 다루는 ‘그래비티 (2014)’와 같은 방식이 아닌, ‘우주선이란 소우주에 새로운 세대는 어떻게 정착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계시록을 통과하는 창세기적 환유였기 때문이다.
언뜻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 (1972)’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이 영화에는 전사는 분열되어 있다. 몬테는 욕망을 통제 당하고, 그 규율에 대한 순응을 강제 당한다. 욕구와 전사 모두 거세당한 몬테는 인류의 생존을 위해 철저히 물화 되는 존재다. 물화 되는 존재. 창세기를 비롯한 모든 신화의 은유는 인물을 물화시킨다. 거듭되는 임신을 위한 실험 끝에 타의 적으로 성공된 섹스는 원치 않는 임신으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모든 이들이 저마다 육체와 욕구의 억압을 견디지 못하고 카메라는 그것을 역동적으로 잡아내는 데에 비해, 몬테의 표정은 공허하다. 그러나 이 공허는 앞선 수직 선상의 매혹에서 비롯된 공허가 아니다. 오히려 생존을 제외한 모든 욕구가 소거된 자의 부유하는 상태라는 설명이 더 걸맞다. 이 영화의 유일한 생존자가 어떤 기적을 만들어 냈는지, 그리고 그 기적의 창세기는 어떻게 계시록으로부터 도출되었는지를 기억하자. 블랙홀을 마주하고 딸의 얼굴을 바라보던 몬테의, 아니 패틴슨의 표정에서 나는 클레르 드니의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
원점으로부터 이동 가능한 좌표적 활력
내가 가장 사랑했던 배우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죽음 앞에서 정한석은 그의 연기론을 추도사로 올렸다. 정한석은 그의 연기가 ‘힘을 포착하는 힘’이라고 명명했다. 배우의 연기, 그 활력을 정의하려는 시도는, 사랑하는 배우를 위해 글을 쓰는 존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헌사라고 생각한다. 내게 패틴슨의 연기는 ‘원점으로부터 이동 가능한 좌표적 활력’이라고 느낀다. 어느 방향으로든 확장할 수 있으며, 동시에 어느 방향으로든 축소할 수 있다. 수직과 수평을 관통하는 일종의 원점 같은 연기. 매혹의 추락을 연기함과 동시에, 생존의 질주를 나타내는 힘. 정지와 운동에 능한 그의 눈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은, 카메라의 소실점처럼 영화의 또 다른 초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가 다시 상업영화로 돌아온 지금도, 그의 눈이 지닌 축은 변함없이 굳건하리라 믿는다. 해가 지고 난 후, 패틴슨은 연기라는 추상성 안에 스스로의 축을 세워놓았고, 그 활력은 나와 당신에게 도달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