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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LTNG DWN Mar 20. 2020

성자는 자본 앞에서 두 번 죽는다.

행복한 라짜로, 앨리체 로르와커, 2018

 이따금 우리는 황폐한 삶에서 기적이 돋아나기를 바란다. 아무것도 잉태할 수 없는 광야에서 우연 같은 생명이 그 지면에 맞닿아 공간을 모두 뒤덮기를 원한다. 당신이 원하는 생명의 도래는, 희망이라는 한 종류의 씨앗일 수도 있으며, 순식간에 그 대지를 가득 채울 덩굴 같은 결실일 수도 있다. 동시에, 당신이 처한 그 황무지도 여러 종류로 존재할 것이다. 혹자에겐 스스로의 몰락을 초래한 결정의 후회일 수도 있으며, 우울에 잠식당한 심리적 불안일 수도 있다. 개인의 결실과 황무지는 그 형태를 달리하며, 어느 하나 일치하지 않는 그중 당신과 나, 모두가 발을 내딛고 있는 척박한 공간이 있다면, 그것은 베버의 이름을 빌린 차가운 쇠창살이 아닐까 싶다. 자본의 속박. 모두가 생산 주체로서 존재해야 하며, 동시에 재화로 존재하는, 두려우리만큼 거대하고 단단한 구조는 단 한 명의 구성원도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수많은 이들이 그 경계로부터 벗어나 초월하기를 소망하지만, 어떠한 예외도 허락하지 않는 철저한 체계는 다시금 그들을 질서의 인력 속으로 재배치한다. 자본의 계산 단위와 행정적인 수치의 일부로 편입된 우리는 끊임없이 수탈당하며, 영원한 굴례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간절히 기적을 바랄 뿐이다.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의 '행복한 라짜로' (2018) 또한, 당신이 공유하는 그 간절함으로부터 이야기를 꺼내려했을지 모른다. 성서에서 차용한 '라짜로'라는 직관적인 이름이 담긴 제목은 이 영화가 꺼내려하는 일종의 신화를 명징하는 선언과도 같다. 성서의 라짜로. 사복음서를 통해서 드러나는 라짜로라는 인물은 사실 두 명이다. 베다니 사람으로 마르다와 마리아의 동생. 예수의 가장 가까운 인물로 등장하여, 죽은 지 4일 만에 무덤으로부터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는 인물이다. 성자. 전능한 능력을 힘입어 수혜를 받는 인물이다. 동시에, 라짜로는 예수가 부자를 향해 일갈하는 누가복음서에 등장하는 비유적 존재이다. 가난과 고난의 밑바닥에서 온 몸에 부스럼을 이고 부자의 집에서 구걸을 하는 무력한 거지 나사로는, 죽음 이후 천국으로 향하며 자본가의 악행이 그대로 지옥이라는 심판으로 이어진다는 권선징악의 결말에서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이윽고 예수는 부자가 천국을 가는 것이 마치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는 이야기를 통해 그가 견지하는 자본가에 대한 반감을 나사로의 예시를 통해서 드러냈다.

 그렇게 로르와커의 영화에서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 분)'은 성자이면서 동시에 가장 사회의 하층민으로 등장한다. 단순한 하층민이 아니라, 착취 계급에게 착취를 당하는 가장 밑바닥에 위치하는 일종의 노예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담배 산업의 여왕 알폰시나 데 루나 후작부인 (니콜레타 브라스치 분)의 지배 아래 문맹 상태와 다름없는 인비올레타 주민들이 있으며, 그들에게 마저 착취당하는 그의 계급을 영화는 후작부인의 입을 빌려 명확히 계층의 역학관계를 나타낸다. "나는 그들을 착취하고, 그들은 저 아이를 착취한다"는 그녀의 대사는 직관적이다 못해 지나치게 친절하다. 영화는 친절하다는 비판을 듣더라도, 라짜로의 위치를 관객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단순히 부활한 성자의 나사로만을 이야기하고픈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신화에 앞선 계급을 강조하려 하는 것이며, 오히려 영화는 라짜로를 전반부에서 그저 뛰어난 일꾼으로 격하시켜 버린다. 담뱃잎을 추수하는 모든 마을 사람들은 라짜로를 원한다. 그러나 마을에서 그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그의 영민함 때문이 아니다. 물론, 그가 몇 사람의 몫을 혼자서 감당한다는 점에서 그의 능력이 일부 유효해 보일지 모르나, 그가 하는 일들은 닭장을 지키고, 병든 할머니를 모시고, 무거운 짐을 들며, 농사일을 도맡아 하는 것이다. 다른 여러 명의 일꾼으로 충분히 대체될 수 있는 그의 역할. 정당한 대가는커녕 최소한의 식량도 마지막에야 돌아가는 그는 명확하게 수탈당하는 피해자며, 자본의 구조 속의 도구다. 하지만 목가적이다 못해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그려지는 인비올레타의 풍경 속에서, 영화는 관객들에게 라짜로라는 착취당하는 이를 바라보는 참혹함 대신 산뜻한 이미지들과 비범한 분위기를 나열하여, 의도적으로 가해의 사실을 뒤로 가린다. 탈곡기를 돌리며 쏟아지는 잔해들은 그들의 수탈과는 무관하게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인비올레타를 비추는 햇살은 한없이 따스하며, 그 온화한 질감은 필름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긴다. 여기서 우리는 찰나의 의문을 가진다. 왜 영화는 권력가의 입을 강제로 열어서라도 계급관계를 표징 하면서도, 의도적으로 그 수탈의 구조를 감성에 편승하여 지우려 하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성자의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라짜로의 중의성. 착취 계급인 동시에 성자의 신화. 사실 우리는 이 두 가지의 이야기를 구분 지어 이야기하지만, 사실 근본적으로 같은 논리를 공유하고 있다. 후작 부인이 오기 직전의 장면으로 되돌아가자면, 어린 안토니아 (아녜스 그라지아니 분)는 라짜로와 함께 그녀가 머물 별장을 수리하며 별장 곳곳에 서린 성자들의 표식들을 이야기한다. 그 성자들의 이야기는 대개 착취와 고문에도 견뎌내거나 희생당한 이들이었다. 착취 계급의 여성이 유방을 도려내는 고문을 받고 고통을 감내하는 이야기가 도리어 하나의 신화가 되어, 개인의 숭고함으로 둔갑한다. 고문을 가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가리어지고, 그 위에는 피해자의 혈흔이 신성시되어 수탈자의 저택 위에 장식품으로 남는다. 우리는 후작 부인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교육하는지 알고 있다. 지식과 계몽의 지위를 격하시키고, 종교의 위엄성을 찬미한다. (지식과 계몽의 지위가 절대적이라는 이야기를 하고픈 것은 아니다.) 종교. 절대자로의 귀의. 복종과 순종에 대한 강요. 그것은 그녀가 인비올레타 마을을 지배하는 방식과 일치한다. 성자의 신화는 결국 피해자의 순종과 복종에 따른 상흔을 치켜세워 인과성을 짓이기는 이데올로기의 방식일 뿐이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과연 라짜로가 신에 버금가는 비범성을 지닌 채 태어난 신성한 존재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다수의 평론가들이 라짜로에 신성함을 대입하려 하지만, 라짜로의 부활 이전 전반부의 그의 모습을 일종의 메시아로 일컫기에는 지나치게 순수하다. 아둔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그가 그저 순종적이며 착한 선인 일지는 모르지만, 절대자나 숭고함의 모습에 도달하기에는 한없이 평범하다. 영화의 첫 시작, 마을의 어르신이 라짜로를 불러 약혼 의례에서 악기를 연주해달라고 명령하는 그 광경에서, 카메라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익스트림 롱샷으로 비추며 라짜로가 도대체 누구인지 식별할 수 없게 만든다. 오프닝 시퀀스가 진행되는 초반 5분 내내, 우리는 라짜로를 특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영화는 다른 이들을 먼저 비춘다. 간간히 카메라는 라짜로에게도 관심을 건네지만, 지극히 평범한 선인으로 등장한 그에게는 어떠한 특징도 없이 지나간다. 오히려 라짜로는 그저 수탈구조의 도구로 충실한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후작부인에게는 충실한 일꾼으로, 인비올레타 마을에선 지불하는 대가 없이 사용 가능한 노동력으로,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에 반기를 드는 탄크레디(루카 키코바니 분)에게 라짜로는 납치범이라는 역할을 배분받고 그것을 성실히 수행한다. 성인으로의 신화를 만들기 위한 가장 최적의 인물인 것이다. 순응적이며, 헌신적이고 선인이다. 기득권의 위치에서 바라보기엔, 그는 착취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존재다. 대적하지 않으며, 무엇을 주입하든 그에 맡게 행동을 하는 아둔한 인간. 영화는 전반부의 라짜로를 그리는 데 있어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감성적인 장면들을 삽입한 이유를 여기서 제시한다. 부활이라는 의식을 치르기 이전, 영화는 라짜로가 신화의 대상이 되기 위한 모든 설정을 준비한다. 피해와 수탈의 구조를 상기시키기보다는, 감독의 전작에서 일관되게 보였던 자연주의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을 삽입한다. 관객들은 일종의 신비성에 매료되어 라짜로가 어떠한 일들을 당했는지를 잊게 된다. 영화는 모든 준비를 끝내고 단 한 가지의 장면으로 이 무대 장치 위에 성인으로의 나사로를 세운다. 그리고 마법이나 기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환상에 가까운 장면을 구현한다.


 열병을 앓은 그가 깨어난 아침, 탄크레디를 위해 라짜로는 여느 때처럼 걸음을 옮긴다. 그러다 그는 문뜩 무언가를 본다. 그 대상은 명확하지 않다. 이윽고 그는 정신을 잃으며 추락한다. 그는 무엇을 보았는가? 그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 밝혀지지 않은 채, 명확한 이유 없이 라짜로는 추락한다. 심지어,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때에 말이다. 이 영화를 관람한 세 번 내내 객석에서는 모두가 탄식을 뱉었다. 어느 누구도 이런 장면이 들어가리라 생각하지 못했기에. 그렇게 라짜로는 추락한다. 이때의 충격은 마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자브리스키 포인트' (1970)의 폭파 장면만큼 아득하게 다가온다. 비슷한 구도로 폭파하듯 떨어지는 라짜로. 그는 무엇을 보았는가? 우리는 그가 본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아니 영화는 그것을 가린다. 마치 불가항력적인 일이 벌어지듯이, 운명처럼 라짜로는 실족한다. 우리는 이 장면을 설명할 수 없다. 그저 영화라는 신이 라짜로를 점지했고, 모든 무대를 갖춘 뒤 그의 운명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라짜로라는 체스 말을 그 판 위에서 쓰러트렸다. 그 광경을 그저 우리는 목도할 뿐이다. 라짜로는 죽었다. 

 동시에, 영화는 황급히 그 현장을 빠져나와 그가 죽어있는 산을 저 멀리에서 잡는다. 도망가는 카메라의 한 편에는 영화 내내 이름 모를 바람의 출처를 알린다. 그 바람은 어디서 왔는가? 라짜로의 죽음 이전, 우리는 바람의 기원을 알지 못한다. 그저, 그 바람이 등장하는 시점이 존재할 뿐이다. 따뜻하게 다가와 공동체에 번영을 가져오는 척, 권력의 측면에 기생하여 단물을 빠는 중개인 니콜라 (나탈리노 발라소 분)가 쫓겨날 때. 탄크레디가 자신의 강아지를 농민들보다 더 우선시 여길 그때. 탄크레디의 실종 이후 니콜라의 여식이 그를 찾으라고 명령할 때. 바람은 이따금 불어오며, 기득의 위치에 있는 권력가들은 황급히 그 자리를 벗어난다. 니콜라는 오토바이 사이드 미러 한쪽을 뺏긴 채 다급하게 벗어났으며, 탄크레디 역시 라짜로의 안식처로 피난한다. 그리고 라짜로의 죽음 직후 그 기묘한 바람의 출처는 그 얼굴을 드러낸다. 라짜로가 쓰러져 있는 산을 급히 빠져나온 카메라의 한 모퉁이엔 수평선을 가로지르는 헬기가 보인다. 우리는 그 헬기로부터 친숙하고 기묘한 바람의 소리를 듣는다. 그렇게 바람의 정체가 밝혀지자마자, 내내 폐쇄되어 있던 기이한 공동체의 문이 개방되었고 한 사람으로의 지배 권력은 몰락했다. 서사의 표면적 인과 관계에서는 탄크레디의 전화와 니콜라의 여식의 신고가 개인의 자본가를 무너뜨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카메라가 황급히 도망쳤던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영화의 절대적인 존재는 난데없이 라짜로를 죽이고, 그 자리에서 전근대의 자본가를 함께 수장시켰다.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보이는 두 사건의 병치는 이 죽음의 인과성을 부여한다. 라짜로는 영화라는 신의 선택을 받아 대속 제물이 된다. 그 희생을 통해서 알폰시아 데 루나라는 지주는 심판을 받는다. 무엇을 위해 영화는 스스로 절대자의 위치에 올라 걸인 나사로를 죽이는가? 


 만들어진 신화를 위해 라짜로는 죽었어야 했다. 영화가 그를 성인으로 규정한 이상, 그는 고난 끝에 죽음을 맞이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순수했고, 목적성 없이 선을 행했다. 봉건제의 착취 제도에도 그는 문제없이 맡은 바 모든 것을 수행해 나갔다. 하는 수 없이 영화는 스스로가 죽음의 동기가 되어 그를 희생시킨다. 그리고 그에게 새롭게 성인의 칭호를 붙인다. 어린 안토니아가 그의 자식 피포에게 늑대와 성자의 이야기를 해주면서 말이다. 사실 늑대와 성자의 이야기는 가톨릭 신앙에서 꽤나 익숙한 이야기다. 성 프란체스코와 구비오의 늑대 설화 말이다. 이탈리아에서 널리 구전되어 온 성 프란체스코에 대한 설화 중 일부로, 이야기는 대략 이러하다. 구비오에 늑대가 굶주린 채 사람들을 잡아먹기 시작하면서 온 마을 사람들이 공포에 떨었다. 성 프란체스코는 그런 구비오의 늑대와 마주쳤고, 늑대는 그를 잡아먹을 듯이 달려든다. 프란체스코는 성호를 긋고 달려드는 늑대를 온몸으로 받으려 한다. 늑대는 그 순간 온순해져 한 마리의 개처럼 그의 발아래에 앉았다. 동물과 소통이 가능했던 성인은 굶주린 늑대의 고통을 헤아렸고, 마을 사람들은 그 늑대를 먹이며 평화로이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토니아의 이야기는 그런 지점에서 보다 명확하게 라짜로와 늑대의 관계를 성자의 신화로 환원하려는 의도를 드러낸다. 안토니아의 내레이션이 깔리며 카메라는 라짜로의 부활과 늑대의 순종을 함께 담아낸다. 늑대. 우리는 이 시점에서 늑대를 처음으로 마주한다. 이전에는 소리로만 들리던, 탄크레디와 라짜로가 언덕 위에서 외침으로만 교감하며, 공동체의 위협으로 규정했던, 실존이 불확실했던 존재가 성인의 부활이라는 영화적 환상과 함께 그 실체를 형상화한다. 그 순간, 우리는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 (망자의 부활)과 불확실한 실체의 구체화 (소리의 실체)가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을 접한다. 기적과 환상이 혼재하는 그 공간을 기점으로 화면은 스스로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려는 듯이 둔탁해지고 감색한다. 영화는 스스로의 신성함을 휘둘러 세월을 뛰어넘고, 선인을 부활시켜 성자의 자격을 부여하면서 환상을 만든다. 결국 영화는 손아귀에서 모든 것을 구원할 메시아로 남는 것인가?

 이미 수많은 영화들에서 시네마 스스로가 절대자를 자처하며 기적을 발휘해 창조주의 자격으로 모든 것을 구원하려 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프랑크 카프라의 '멋진 인생' (1941)의 조지 베일리가 모든 비극으로부터 구원받는 서사에서 영화는 스스로 천사를 자처한다. 코엔 형제의 평작인 '허드서커 대리인' (1994)에서 얼간이 노빌 번즈를 구원하는 천사는 과연 누가 보낸 것인가. 하물며, 끝없는 몰락을 겪는 PTA의 '매그놀리아' (1999)의 구원, 개구리 비는 과연 누가 허락한 것인가. 우리는 이미 영화 스스로 절대자로 군림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것이 훨씬 더 쉬운 방향인 것 또한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로르와커는 이 열화 된 필름 위에서 보다 어려운 결정을 내린다. 모든 것을 구원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 그녀의 카메라 위에서 라짜로를 죽이고 되살리는 모든 선택들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이 모든 기적이 환상임을 인정하려 한다. 그녀의 결단은 바로 기적과 환상이 혼재하는 그 변곡점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부활한 라짜로에게 권능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저, 살려 놓은 것으로 만족한다. 20년이 지난 세상에 라짜로를 살려 두었음에도, 그는 어느 것도 구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세상은 변했는가? 그렇지도 않다. 개인의 자본가를 죽인 20년 전의 그들은 여전히 사회의 가장 하층민이다. 기찻길 옆 주유탱크는 한 켠의 빛도 들어오기 어려운 공간이다. 주인 없어진 인비올레타의 물건을 훔쳐 사기를 치는 이들은 변하지 않았다. 그저 20년 전의 직접적 수탈에서 벗어났지만, 더 큰 구조에 기생하며 생존을 모색할 뿐이다. 근대에서 현대로,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전환에도 피해의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침탈당하며, 생존 그 이상의 가치를 바라기에는 현실은 우러러보는 사치품이 된다. 작금의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는 로르와커의 결단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창조주는 20년의 시간을 한 순간에 뛰어넘었고, 개인의 자본가를 죽임으로 구조를 바꿨다. 그럼에도 피해자는 바뀌지 않는다. 한없는 무력감이 창조주에게도 찾아오는 순간이다. 제아무리 신의 손길이 개입한들,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비참함은 지울 수 없다. 인정해야 할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창조주의 품을 떠나는 피조물. 로르와커는 그렇게 자신의 손에서 이 세계관의 운명을 떠나보낸다. 

 구조의 괴물이 도사린다. 그러나, 그의 실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력 중개인 니콜라는 여전히 노동력을 빨아먹고 산다. 그는 후작부인의 권력에 기생하던 지난날과 달라진 게 없다. 다만, 이제 그의 등 뒤에는 자본가가 아닌 자유시장이 존재할 뿐이다. 이리저리 주판을 돌려 계산하며 빚더미를 불리던 세리는 확성기를 든다. 더 이상 그가 계산하지 않는다. 더 간절한 이들이 알아서 시장의 가격을 조정한다. 그가 하는 일이라곤, 시작가를 부르고 그 셈을 촉진시키려 할 뿐이다. 어른이 된 안토니아 (알바 로르와커 분)의 가족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수탈당했던 과거의 재배 기술은 그들에게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그것을 제외하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적법한 것은 없다. 결국 이들은 착취 대신 기생을 택한다. 어른이 된 탄크레디 (토마소 라그노 분)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은행에 몰수당한다. 과거 자신의 땅이었던 인비올레타에 대한 잔상으로 이리저리 사기를 쳐보려 하지만, 그마저도 어렵다. 성자의 신화를 위해 준비했던 영화의 동산을 떠나온 이들은 현실에 진통을 겪고 있다. 모두가 굶주린다. 곯은 배를 채우는 데 모두가 혈안이 되어 있다. 니콜라도 안토니아도 탄크레디도 이 구조의 인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창조주도 손을 놓은 이 현실에서 성인 라짜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짜로가 부활한 그 시대에, 수탈의 이익을 갈취하는 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도리어 모든 이들의 빚이 늘어간다. 우리는 이 비극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 수 있다. 시장의 동반 몰락. 구조의 괴물은 스스로를 좀먹으며, 공동체를 집어삼킨다. 20년 전 그 봉건의 구조에서 모든 계산의 총계는 0이었다. 수익의 총량제. 얻는 만큼 잃는 자도 눈에 보이던 그 공간. 그러나 작금의 구조는 폭주한다. 유통되는 자본의 총계는 절대 0이 되지 못한다. 모두가 적자인 구조, 눈덩이만큼 느는 빚더미 속에서 허울뿐인 기관들을 제외한 모든 개인들은 공멸한다. 해법이 보이지 않는 이 구조의 비극 앞에 성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적을 부리기 위해선 그에 조응하는 실체화된 대상이 필요하지만, 그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따금 영화로부터 권능을 입은 그는 자그마한 능력 (기찻길 옆 들풀들의 이름을 아는 전근대로의 능력)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구원으로 이어지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무력감이 지배하는 현실은 이미 영화의 손을 떠났기에, 성자는 어느 누구도 무찌르지 못한다. 자신의 대속으로 일궈낸 전근대의 종말은 되려 자본론의 괴물을 키워냈다. 창조주의 손을 떠난 신화는 그 비통함을 가슴에 품고 실체화된 절대악을 찾아 나선다. 그곳에서 라짜로는 은행을 만난다. 문전박대당한 탄크레디와 그들을 비웃는 은행. 그리고 은행이라는 구조 앞에 박제된 전근대의 번영, 올리브 나무. 그러나 그 올리브나무에는 생기가 없다. 거대한 악이 죽인 채 전시당하는 번영의 산물은 전혀 영롱하지 않다. 그는 그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었는가. 그의 눈에는 슬픔이 가득하다. 죽어있는 것을 바라보는 성자의 비통함은 스스로 그 운명을 거스르려는 판단으로 이어진다. 죽은 종교로부터 음악을 이끌어 오는 이적을 행한 라짜로는 돌아오는 그 길에서 다시 한번 고사목을 목도한다. 차라리 전근대의 앞잡이였던 이데올로기의 시절이 나을 정도로 비참하게 몰락한 종교. 두 그루의 올리브나무는 이질적이며, 그 곁을 비추는 볕에도 성자는 눈물을 흘린다. 그의 비통함은 그를 움직이게 한다. 사실, 성자의 운명은 대속의 존재로 제단 위에서 작렬히 산화하는 것이다. 구원과 대적은 선지자와 메시아의 몫이다. 하지만, 버려진 성자는 제단 위를 내려와 무기를 쥔다. 보이지 않는 구조는 대적할 수 없기에, 그들이 박대당한 은행을 향해 달려간다. 분노가 아닌 비통함이 서린 그의 언어에는 성자의 품격은 여전하다. 탄크레디의 재산을 돌려달라는 그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순수하다.


 무기를 둔 성자는 성스럽다. 그럼에도 현실은 그 성스러움이 발현되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군중들은 어리숙한 라자로의 요구에 분노하여 그를 구타한다. 굳이 그래야 하나 싶을 정도로 성자는 처참히 밟힌다. 그렇게 눈을 감지 못한 채 굳는다. 죽음보다는 정지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다시 우린 프란체스코의 성자와 늑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전근대의 굶주린 민중들은 성인의 발아래에 순종했다. 그러나, 시장경제의 분노한 늑대들은 성자의 살점을 뜯는다. 영화에서 단 두 번 등장한 늑대는 성자의 첫째 부활과 둘째 죽음을 목도한다. 성난 군중들은 개인의 자본가를 심판한 성자의 자비 앞에 무릎을 꿇지만, 자본의 괴물 앞에 무력하고 아둔한 그의 살점은 물어뜯는다. 영화는 정지한 라짜로의 곁에서 늑대로 위치를 옮겨간다. 그 늑대는 둘째 죽음, 두 번째 승부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승리하지 않았다. 로르와 커의 위대한 결정은 그래서 진정으로 탄식을 내뱉게 만든다. 영화는 온 힘을 다해 환상을 구현한다. 개인의 자본가를 심판하고, 만들어진 신화 위에 성자를 세웠으며, 부활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영화는 인정하고 만다. 그 모든 허울로의 환상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한다는 것을. 이윽고 그녀는, 절대자는 그 기적을 행하기를 포기하고 성자를 현실 위에 유기해둔다. 도무지 보이지 않는 체제의 손아귀 안에서 모두는 패배했고, 성자는 최선을 다했지만 어느 누구도 구원하지 못한 채 살점을 뜯긴다. 영화의 환상이 머무르다 그 자리를 떠나고, 남은 것은 짙은 패배감과 무력감이다. 그렇게 당신이 간절히 바라던 기적은 환상으로 남은 채, 현실에게 그 주체성을 내어준다. 탄식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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