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5일
내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카라얀의 씨디를 닳도록 들으면서 (말이 안되나?) 벼르고 별렀건만, 이상하게도 말러 9번의 공연을 볼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중, 게르기에프 말러 사이클 중 9번에 자리가 났다는 소식에 무조건 가기로 했다. 낮잠을 푹 잔 뒤, 면도하고, 목욕하고, 아껴둔 양복과 멋진 운동화를 입고 바비콘 홀에 갔다.
말러 10번 아다지오와 9번.
이번에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약간 차갑게 느껴졌다. 지난 번 삐에르 불레즈를 들을 때도 그랬다. 모두가 훌륭하지만, 앙상블도 최고지만, 어쩐지 서늘한 느낌.
당시 불레즈는 최고였다. 80이 넘은 그는 (심지어 불레즈도 늙는구나!) 런던 심포니를 유린하면서 바르톡, 쉔버그, 그리고 자신의 곡을 정말이지 완전히 삶아서 내놓았다. 하지만 바비콘 홀의 리버브가 약해서 그런 건지, 당시 오케스트라 자체의 앰비언스가 그랬는지, 아니면 그냥 내 맘이 추웠는지 어쨌는지, 하여튼 전반적으로 차가운 느낌을 받았다.
아다지오가 시작한다. 비올라 도입에 이어 유장한 제 1 주제가 이어진다. 데릭 쿡의 악보이다. 아끼며 들었던 BBC 웨일즈의 음반과 같은 템포이지만, 내부 전개는 약간씩 빠르게 가져간다. 이 절묘한 아다지오의 초고를 쓸 때만해도, 말러는 죽음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 있었다. 에서와 같은 영원한 생명의 순환에 대한 기를 느꼈다고나 할까. 그의 초고에 남겨진 창작 의지와 창조성이 어느 누구의 완성된 작품에 깔끔하게 완성된 정리보다 더 강렬하다.
이 아다지오에 담겨진 긴박감은 미스터리 그 자체이다. 어떻게 이렇게 아련한 따듯함 속에 동시에 임박한 위기에 대한 염려, 그 염려에 대한 관조적 초탈과 냉소가 동시에 담길 수 있을까.
10번 교향곡을 작곡하던 중, 말러는 아내가 젊은 남자와 바람피우는 중이라는 사실을 다름 아닌 그 바람둥이 내연남의 편지를 직접 받으며 알게 된다. 이 내연남은 연상의 유부녀 킬러였으며, 내통하는 유부녀의 남편과 친교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그는 알마와 결혼했지만, 나중에 그녀가 결국 또 다른 남자의 애를 낳아 자기 성을 붙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알마는 랑에 빠져 정신이 없었고, 말러는 병마에 시달리던 말년에 최후의 일격을 맞은 격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죽는 날까지 알마를 사랑했고, 또한 그녀의 사랑을 되찾기를 원했다. 이 아다지오를 쓸 당시 그는 엄청난 파국에 대한 일종의 예지몽과 같은 영감을 받았던 것 같다. 이 악장은 불멸이다. 그리고 이 음악은 배반당했지만 그래도 변함없는 사랑도 불멸의 지위를 얻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다지오는 말러의 작품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심오한 악장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음악을 듣다 보면, 이 곡이 초고가 아닌 완성된 작품이었다면 정말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상상 없이 듣기 어렵다. 특히 곡이 진행되면서 틀림없이 낮은 현의 대위 선율이 제시되어야 할 부분에 콘트라베이스가 쉬고 있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이 머릿속으로 채워가면서 듣는 수밖에 없다. 이런 불경스런 자들을 염려한 아도르노는 이 교향곡 초고를 아예 연주하지 말자고 했다.
게르기에프는 아름다웠다. 럭비 선수같은 몸매에 사자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뜻 밖에 공연 내내 우아한 춤을 추었다. 발레 하는 맹수라고나 할까. 이런 지휘는 또 처음이다. 지휘봉이 없이 양 손을 활짝 벌린 상태에서, 살풀이 하는듯한 자세로 성큼 성큼 움직이며 몸과 팔을 움직였다.
학처럼 팔을 펼쳐서 오케스트라에서 음을 끌어 당겨 안듯이 지휘했다. 펼쳐진 팔 끝에서 손가락이 움직이는데, 강박에서 멜로디 라인의 콘투어가 강력하면 마치 피아노를 치듯이 손가락이 움직이고, 서스테인 노트가 있으며 손가락을 그냥 부르르 떠는 것이었다. 이런 지휘는 정말 처음이다.
드디어 말러의 9번. 이별을 고하는 도입에 이어 한숨과 같은 바이얼린 라인이 제시된다. 안녕, 안녕, 그리고 안녕. 오프닝에 숨겨진 자신의 고별이 담겨 있고 첫 번째 주제에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고별의 주제가 담겨있다.
말러는 남겨진 모든 것에 대해 고별을 고하고 마지막 길을 향에 떠난다. 그런데 이 길의 끝이 안 보인다. 지나는 정경이 지난 세월의 슬프고, 정겹고, 흥겨웠던 감흥을 되살린다. 하지만 이 길을 이제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끝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길이 끝나지 않는다.
게르기에프의 런던 심포니는 뒤로 당기는 법이 없다. 전체적인 흐름은 카라얀의 템포를 따르는 것 같지만 각각의 개별 페시지는 발터의 그것처럼 내적 동력을 강조한다. 따라서 얼핏 들으면 아바도 같지만, 아바도가 강조하는 다이나믹과도 매우 다르다. 게르기에프는 전체적인 진행감보다 개별 주제의 내적 긴장감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두 번째 악장에 들어서면, 즐거운 춤과 왈츠를 만나게 되는데, 이런 기묘하고도 기괴한 춤에서 게르기에프와 런던 심포니의 흔연한 일치됨이 빛을 발한다. 그리고 이런 댄스야 말로 말러의 평생 비기이다. 이렇게 유쾌하고 기괴한 춤은 말러 이외에 쉽게 만나기 어렵다. 혹 쇼스타코비치 현악사중주의 스케르초, 데니 엘프만. 마릴린 맨슨, 골든 에이지 오브 그로쵸-스크. 현대의 말러 스케로초의 진정한 계승자는 누굴까?
3악장에서 런던 심포니는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준다. 빠르게 변화하는 진행에 따라 대위되는 미묘한 불협화음이 끝임 없이 돌아가는 론도이다. 따라서 연주자 각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물론 중요하지만, 또한 각자 어떻게 돌아가지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면, 결국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연결이 계속된다. 게르기에프의 런던 심포니는 오케스트라 총보를 좍 펼쳐 보이듯 거침없이, 그러나 확신에 찬 연주를 들려준다.
나는 드디어 알게 되었다. 말러 9번의 3악장은 사실 이런 음악이었구나. 카라얀이나 아바도의 위대한 음반을 들어 보더라도, 이 3악장의 놀라운 명징함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도 그들의 음반이 아닌 실제 공연은 그렇지 않았으리라.
이 악장은 아무리 훌륭하게 연주했다고 할지라도, 직접 현장에서 듣지 않으면 그 복잡함과 농밀함,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위적 선율의 울림을 파악하기 어려우리라. 어떤 세련된 스튜디오 녹음도, 어떤 고가의 오디오도 온당하게 재생하기 어려운 복잡성을 담고 있다. 그리고 9번의 아다지오. 자, 이 첫 번째 주제를 어떻게 연주할 것인가.
반복되지만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주제는, 인생의 가장 심원한 비밀을 전달해 준다. 견딜 수 없는 슬픔은 모습을 바꾸며 계속된다. 하지만 바로 그 슬픔의 기억 속에 구원이 있다. 모든 개별적인 슬픔의 기억을 가슴 깊이 담고 있다가 한꺼번에 연결시켜 기억할 수 있는 이 순간이야 말로 슬픔은 물론, 기쁨도, 절망도, 분노도 함께 견디어 냈다는 내 삶이 자기를 인정하는 순간이다.
아다지오에서 게르기에프는 훌륭했다. 흔히 지휘자의 현은 가슴에서 시작되고 관은 머리 위에서 나온다. 게르기에프의 현은 허리 저 아래에서 올라오는데, 말러 9번의 아다지오의 현의 주제는 거의 바닥을 쓸어서 올라온다. 지휘대를 쓸듯이 헤엄치다가 점차로 올라온다. 그리고 춤을 춘다. 춤이 빨라진다. 그의 거구가 점프했다. 오랫동안 허공에 머문 그의 착지에 정확하게 맞춰, 쿵! 팀파니가 작열한다. 한마디로 이런 지휘를 본 적이 없다.
게르기에프의 말러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아바도와 베릴린 필의 말러 9번을 듣고 싶어졌다. 내 평생 그럴 날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