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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웅 Nov 16. 2018

드워킨 (2013). 신이 없는 종교

2016년 4월 28일

‘신이 없는 종교(religion without god)’라니? 이미 펼쳐 놓은 책들이 몇 권인데, 이런 이상한 제목을 가진 책을 새로 펼칠 여유는 없었다. 그런데 나는 요즘 증오발언 규제에 대해 이런저런 염려가 많다. ㅠㅠ 증오발언 규제론 중 다른 사안은 대충 정리가 가능하지만, 종교에 대한 모욕적 발언이 증오발언 규제 논의에서 특별히 복잡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던 중 드워킨(Ronald Dworkin)이 종교와 민주주의에 대한 짧은 책을 한 권 출판한 적이 있다는 전언을 듣고 바로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읽기를 잘했다.


이 책은 일단 끝까지 달린다. 행장을 가볍게 하고 목적지를 향해 직선으로 달린다. 그 경로에 신과 창조, 쿼크와 우주에 대한 논의를 거치는 데 이런 주제를 엮는 솜씨가 놀랍다. 


이 짧은 책은 2011년 겨울 베른에서 강연한 <아인슈타인 강의>를 기초로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아인슈타인의 종교에 대한 발언을 여기저기 인용하고 있다. 원래 더 두꺼운 책이 될 수도 있었는데 2013년 2월 백혈병으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간단한 모노그래프 형식으로 나왔다. 


종교의 자유는 특별한 권리인가? 


핵심 주장은 간단하다. 미국 헌법 수정1조가 명시한 ‘종교자유 행사의 권리’를 발언의 자유, 적벌절차,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과 같은 특별한 권리로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헌법적 권리 중에서 정치적 자유는 크게 자유주의를 지탱하는 특별한 권리와 이른바 ‘윤리적 독립성(ethical independence)’에 대한 일반 권리가 있는데, 종교행사의 자유는 발언의 자유와 달리 전자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후자, 즉 ‘윤리적 독립성’의 영역에 속한다고 한다. 


만약 종교의 자유를 공적으로 특별한 권리로 본다면, 그것을 규제하기 위해서는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과 같은 심각한 문제가 없는 한 일단 자유를 폭넓게 허용해야 하며, 규제의 필요성이 제기될지라도 ‘엄격한 심사의 요건’을 적용해서 규제의 타당성을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드워킨이 보기에 종교의 자유는 이런 특수한 종류의 자유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 한 추구할 수 있는 개인적 책임에서 유래하는 자유다. 그래도 엄연한 자유이므로 종교에 대한 규제는 다른 일반적 권리를 규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차별적이고 중립적이어야 한다. 


이 주장이 함의하는 바는 명백하다. 종교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충돌할 경우에, 자유주의 국가는 종교의 자유를 이유로 종교인에게 차별적 대우나 특혜를 줄 수 없다. 예컨대, 1990년 스미스 판례(Employment Division, DHR of Oregon v. Smith)라는 연방대법원 판결이 있다. ‘미국 원주민 교회(the Native American Church)’는 종교의례 중 피요테라는 약물을 사용한다. 이는 법으로 금지된 약물이기도 하다. 오레건 주는 주법을 근거로 피요테와 같은 금지약물을 사용한 교인들에게 실업보조특혜를 제공하지 않기로 했다. 지방정부가 종교인에 대한 특혜를 거부한 것이다. 연방대법원은 이런 오레건 주의 정책이 수정헌법1조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미국 종교단체, 시민운동단체, 특히 가톨릭 교회는 1990년 스미스 판결에 반발해서 종교의 특권을 인정하는 <종교자유회복법(1993)> 입법운동을 추진했다. 법안은 양원을 통과했고, 신앙심과 전투력을 겸비한 종교인들의 압력에 밀린 클린턴 대통령은 서명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연방대법원은 요지부동이다. 이 법을 개별 주에 적용할 때 위헌판결을 내리고 있다. 


드워킨은 연방대법원의 1990년 스미스 판결을 인용해서 이렇게 주장한다. 만약 종교적 이유로 미국원주민교회에 약물사용과 관련한 면책을 인정한다면, 약물사용에 대해 같은 견해를 가졌던 헉슬리를 믿는 종교적 집단에 대해서도 특권을 부정할 도리가 없다. 더 큰 문제는 종교적인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로 약물을 사용하기를 원하는 히피나 자유방임론자가 이의를 제기할 때 생긴다. 이들은 국가가 종교단체와 종교인을 편애하는 차별적 정책을 유지해서는 안 된다고 불만을 제기할 수 있는데, 자유주의 국가는 이런 불만에 답변하기 궁색하다. 요컨대, 국가는 신앙을 이유로 누구도 차별할 수 없지만, 같은 이유로 특혜를 줄 수도 없다. 


교회도 법치국가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목사도 세금을 내야한다. 신도들은 모든 신앙의 자유를 누린다. 그러나 신앙을 갖지 않는 자들도 함께 준수하는 그 법을 함께 지키는 범위 내에서 그렇다. 종교인은 인간으로서 존엄성과 시민으로서 자유를 누린다. 그러나 종교를 갖지 않는 다른 시민들도 함께 누리는 존엄성과 자유의 수준만큼 그렇다. 예컨대, 미국은 종교를 이유로 한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는데, 이 면제조항은 종교인은 물론 ‘평화주의자’와 같은 비종교적 신념을 가진 자에게도 적용된다(U.S. v. Seeger, 1965). 이 판결의 원리를 ‘종교에 대한 증오발언을 규제’에 적용하면 어떤 결론이 나오겠는가!  


(참조) 증오발언 규제에 대한 드워킨의 주장: "We cannot make an exception for religious insult if we want to use law to protect the free exercise of religion in other ways. [...] Religion must be tailored to democracy, not the other way around."


신앙심과 도덕적 신념   


드워킨은 자유주의 국가가 종교와 다른 심오한 도덕적 신념을 구별해서 대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전제는 신을 믿는 신앙심과 다른 가치를 믿는 도덕적 신념 간에 내용적으로 차이가 있을지언정, 가치에는 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드워킨의 <신이 없는 종교>는 이 전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책이다. 


드워킨은 종교전쟁이 모든 문화 영역에 개입하는 것을 막고 싶어 한다. 그는 국가가 종교와 일련의 심각한 신념에 개입하는 절대적 존재자의 특별한 역할을 제거하고 대우하면 종교 간 전쟁은 물론 종교와 다른 신념 간의 갈등, 그리고 믿는 자와 불가지론자들 간의 불화도 완화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런 의도를 뒷받침하는 드워킨 자신의 신념은 바로  신앙심과 도덕적 가치에 대한 신념은 서로 독립적이며 또한(!) 내용적으로 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세계에는 물질과 그의 부산물 또는 수반물인 정신이 존재할 뿐 신은 물론 도덕적 가치와 같은 모호한 것들이 존재할 여지가 없다는 입장이 있다. 이른바 자연주의(naturalism)다. 자연주의자 중에는 특히 도덕적 가치가 허상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대상을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정의롭다 부당하다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거대한 환상이며 따라서 자의적이라고 보는 이들이 있다. 이들을 가치 허무주의자라 한다. 이런 자들이 이외로 많다는 게 현대의 병리적 징후라는 주장이 한때 유행한 적 있다. 또한 도덕적 가치란 개인들이 대상에 대해 갖는 주관적인 호불호의 감정에 불과하다고 보는 입장이 있는데, 정의주의(emotivism)를 비롯한 이른바 비인지주의 계열이 이런 입장이다.   


드워킨은 종교적 관점에 대한 자연주의나 비인지주의의 공격이 위력적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와 관련해서 어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가치의 실재성을 믿지 못하는 그들이 문제이지 종교적 심성을 갖고 있는 자들이 아니라고 단언 한다. 인간, 세계, 그리고 그 이상의 어떤 것에 대한 숭고함과 경외심을 갖지 못하는 이들은 ‘그저 종교적 심성이 없을 뿐’이다. 드워킨의 자연주의에 대한 반대는 반박에도 못 미치는 약한 것이지만, 일단 들어 둘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종교나 도덕적 가치가 무슨 악운 같은 것이 아니라는 (하드코어 자연주의자들은 대체로 이렇게 믿는다) 요점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이 요점을 상세하게 듣고 싶은데, 드워킨은 그저 간단하게 넘어간다. 아쉬운 부분이다. 


(신앙심을 갖는 것이 단지 악운에 빠지는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쉽지만, 이 주장만으로 허무주의자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허무주의자들은 ‘뭐 그러든지’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유신론자의 이른바 ‘신에 대한 존재론적 옹호’는 더욱 무력하다. 하기는 유신론자들은 서로 설득하지도 못한다. 이들은 다른 유신론자에게 자기가 믿는 신이 악령이 아니라는 것조차 증명하지 못한다. 남의 신이 악령이라는 증명은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쓸모없는 일이다. 남의 신이 악령임을 확증함으로써 자기 신앙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유신론자와 가치실재론자들  


만약 종교가 악운이 아니라면 마찬가지로 ‘벼락같이 떨어지는 은총’도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종교를 포함한 모든 도덕적 신념은 그것의 가치를 평가하는 주체의 자율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도덕적 가치를 믿는 신념의 담지자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율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가치의 실재성을 드러낼 방도가 없다. 드워킨은 가치 실재론을 옹호하는 반자연주의 논변을 따로 준비해서, 장엄한 2장에 제시한다. 그런데 사실 이 논변은 없어도 그만이었다. 왜냐하면 드워킨이 논변을 전개하는 데 필요한 것은 자연주의와 가치 실재론 간 대립이 아니라 가치 실재론자들 내에서 발생하는 대립이기 때문이다.


가치 실재론자들은 당연히 도덕적 가치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 세상에는  부당한 제도가 있으며, 좋은 행동이 있다. 즉 어떤 행위를 보면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정의롭다 부당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원리가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실재론자는 다시 두 부류로 나뉜다. 한쪽은 도덕적 가치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연원을 따져보면 신, 형이상학적 근원, 또는 진화적 적응 등과 같은 가치의 외재적 근거가 별도로 있다고 믿는 자들이다. 다른 편은 가치는 그 자체로 고유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다른 인간에 대한 잔인하게 행동하는 것이 나쁘다는 생각을 다른 어떤 별도의 이유가 없이 그렇다는 것이다. 드워킨은 이런 입장을 근거내재 가치실재론(ungrounded realism)이라 부른다. 전자의 입장, 즉 인간은 잔인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할 수 있는 이유로 (1) 신이 명령해서, (2) 잔인함과 같은 악덕의 체계가 별도로 있어서, 또는 (3) 인류는 잔인함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도록 진화했기 때문에 등과 같은 별도의 이유로 돌리는 이들은 근거외재 가치실재론(grounded realism)이다. 


드워킨은 종교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 유신론적 종교를 포함한 근거내재 가치실재론이 도덕적 가치를 정당화할 수 있을지 논의한다. 이를 위해 이른바 ‘유티프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름 답변을 제시한다. 유티프로 문제란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에 대해서 그 행위가 옳은 이유가 신이 명령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 행위가 옳기에 신이 그렇게 명령하는지 묻는 것이다.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건, 그의 형벌이 두려워서건, 혹은 다른 이유로라도 도덕적 행위를 선택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행위의 선택이 도덕적 가치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도덕적 가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특정 행위를 선택하는 이유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행위라도 도덕적으로 옳은지 아닌지, 아니면 무관한지 등을 판단할 수 있는 배경을 제공하는 도덕 원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초월적 사건이나 거부할 수 없는 섭리를 들고 나와도 마찬가지다. 그런 초월적 사건이나 섭리가 아무리 신비해도 도덕적 판단에 배경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도덕적 원리가 필요하다. 


<신 없는 종교>가 이런 논지에서 이끌어 내는 요점은 간단하다. 가치판단의 배경이 되는 도덕적 원리를 전제하고 또한 제공한다는 점에서 모든 윤리적 명령의 기초를 제공하는 종교와 다른 가치실재론 간에는 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요컨대, 도덕적 행위의 주체라는 점에서 신에 대한 거룩함을 느끼는 종교인과 심오한 도덕적 신념을 그저 느끼는 가치실재론자는 차이가 없다. 특히 인격을 갖추고 인간사에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벽화에 등장하는 신>이 아니라 우주의 원리를 담지하고 인생에 <의미를 제공하는 신>이라면 도덕적 판단을 제공하는 배경적 원리의 역할에 차이가 없다. 


드워킨은 무신론자이지만 종교적 심성을 가진 자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가) 아인슈타인이 언급한 경이로운 우주법칙을 낳은 신, (나) 틸리히의 상징하는 신에 대한 논의, (다) 스피노자의 자연의 법칙을 구성하는 신을 소개한다. 인격신을 믿지 않고도 거룩한 심성과 우주에 대한 숭고한 감상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신을 진정으로 믿는 신앙인, 자연과 우주에 대한 경이로움을 느끼는 과학자들, 도덕적 원리를 인식하고 그에 따르는 신념을 지닌 자들 간에 질적인 차이가 없음을 밝힌다.  


앞서 말했듯이 가치 실재론자들 중에서 법적으로 특별히 문제가 되는 이들이 있다. 바로 도덕적 가치가 신의 존재와 관련된다고 믿는 종교인들이다. 문제라고는 했지만, 이들이 무슨 사고를 치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오래된 국가는 물론 현대 자유주의 국가가 이들을 특별하게 대우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그렇다. 드워킨이 보기에 국가는 그럴 필요가 없다. 종교인을 포함한 근거외재 가치실재론자 전체를 도덕적 가치의 실재성을 다른 이유 없이 믿는 가치실재론자들과 다르게 대우할 이유가 없다. 


신을 믿건 말건, 도덕적 가치를 믿는 자들은 믿는 바를 표현하고, 서로 같은 믿음을 표현하는 자들과 결사체를 만들고, 믿음을 기초로 집단적 실천으로 행한다. 근대 자유주의 국가는 이런 결사체와 행위가 한 종류가 아니라 여럿이며, 그것도 서로 모순하고 갈등하는 여럿이라는 배경에서 출발했다. 자유주의 국가의 헌법은 특정한 도덕적 신념의 내용을 이유로 신념의 결사체를 선호하지도, 차별하지도, 억압하지도 않을 것을 원리로 갖는다. 


우주의 숭고한 미 


드워킨의 <신이 없는 종교>의 2장의 제목은 ‘우주’이다. 처음 읽을 때는 무슨 이유로 이러시나 싶을 정도로 정신없는데, 읽고 나면 결국 ‘가치실재론의 근거내재성’을 설명하기 위한 보조적 논변임을 알 수 있다. 이 ‘우주’ 장의 요점은 천체물리학과 같은 과학에서 이론적 작업을 할 때에도 일종의 미적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과학에 개입하는 가치란 실은 법칙의 필연성(inevitability)이며, 이런 필연성은 ‘외적으로 다른 기준을 적용해서 해명할 필요가 없는’ 통일성(integrity)와 같다는 것이다. 드워킨의 주장도 주장이지만, 전개 방식이 대단히 우아하다. 


우주가 아름답다는 판단은 미적 판단인가 도덕적 판단인가? 드워킨은 우주에 대한 숭고미와 경외감이 사실 상 같은 종류의 것이라고 본다. 현실과 독립한 ‘가치의 세계’가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다는 점에서 동일한 종류다. 우주의 신비로움에 이끌려 탐구에 나선 과학자들은 따라서 그저 과학만 하는 게 아니다. 이들은 아름다움, 우아함, 또는 뭐라고 이름 붙여도 상관없는 그런 가치를 적용하고 있다. 


드워킨은 먼저 우주를 탐구하는 과학자들이 과연 ‘미적 기준’을 적용하는지 묻고 답한다. 우주란 그저 잡동사니가 가득한 너절한 것이거나(마르셀로 글레이저가 이렇게 믿는단다), 아니면 그저 멍청한 존재(리차드 파인만이 이렇게 말했단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흔히 과학자들은 우주에 어떤 통일성이 있다고 믿는다. 아인슈타인이 대표적이며, 입자 세계를 넘어 쿼크를 발견하고, 초끈이론을 제기하고, 중력 방정식과 양자론을 결합하려 하는 과학자들도 그러하다. 이들 중 어떤 이는 유신론자인데, 이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신이 있다고 믿든 말든, 과학자들이 탐구를 할 때 적용하는 이론적 개념에 이미 숭고한 아름다움이란 가치가 침투하고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이들은 가치 실재론자들이다.  


그렇다면 과학자들이 탐구에 적용하는 가치기준은 도대체 무엇인가? 일단 단순성(simplicity)나 대칭성(symmetry)이 후보가 된다. 여기에서 대칭성이란 좌우대칭인 얼굴이 이뻐보인다는 식의 관습적 미적 기준이 아니다. 시공간을 포함한 이론적 좌표에서 가능한 어떤 변환과 대체를 거치더라도 변하지 않는 일종의 무변성(invariance)를 의미한다. 과학자들은 대칭성을 일종의 원리로 삼아서 탐구에 나서서 실제로 대칭적 자연법칙을 찾기도 한다. 드워킨은 그러나 단순성이나 대칭성이 기본 가치가 아님을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과학자들은 이를 잘 작동하는 개념적 도구로 사용할 뿐 원리로 삼지는 않는다고 한다. 


우주를 설명한다는 것은 결국 일종의 내적 통합성, 그것도 강한 통합성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새로운 발견이 기존 이론과 모순되거나 다른 별도의 가정이나 명제를 도입해야만 할 때, 기존의 이론적 가정과 핵심 명제를 모두 뜯어 고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통합성이다. 내적 통합성은 또한 필연성이기도 하다. 필연적 설명이란 접하고 나면 ‘과연 그럴 수밖에 없다’는 느낌을 주는 설명인데, 잘 만들어진 이론을 보고 느끼는 심정이야 말로 일종의 경외심에 가까운 어쩔 수 없음이다. 과학적 이론의 내적통합성이란 필연성이자 자기완결성을 의미하는데, 마치 섬세한 한 구성부분이 전체를 지탱하는 듯하고, 전체는 또한 그런 구성부분으로 완결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완성된 이론이란 또한 완전성을 가정한다. 완전성이란 원인의 원인, 그 원인의 더 근원적 원인을 추구하는 무한회귀를 멈추는 설명을 의미한다. 예컨대, 흔히 빅뱅 이전는 무엇이 존재했냐고 묻지만, 빅뱅이론은 실은 이런 질문 자체를 막기 위해 만들어낸 이론이다. 빅뱅은 시공간의 탄생을 설명하는 이론이고 그 이론 밖에 있는 시간, 즉 빅뱅의 ‘이전’이란 시간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드워킨은 말한다. 가치의 세계도 대체로 이런 완결적으로 보이고 완전해 보이는 이론과 같다고. 가치영역 내에서 가치 체계를 구성하는 개별적 가치는 서로 지지하는 가치판단에 의거해서 유지된다. 수학적 체계 내의 명제가 다른 수학 명제들에 의거해서만 유지되는 것과 같다. 과학에 내재하는 미적 가치도 마찬가지다. 과학의 세계에서 우주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이론은 바로 그 완결성과 통일성이 곧 실재하는 아름다움이다. 과학자들에게 아름다움이란 가치는 과학적 이론 이외의 다른 어떤 외부적 연원을 갖지 않는 이론 그 자체에 내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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