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13일
Ray Monk (1990). Ludwig Wittgenstein: The duty of genius.
남기창 역(2012). 비트겐슈타인 평전. 필로소픽.
인성에 결함 있는 자가 훌륭한 철학자가 될 수 있을까? 나는 한때 '나쁜 인간이 좋은 시를 쓸 수 있을지' 고민했던 적이 있다. 그럴 수 없다는 답변에서 그럴 수 있을지 모른다는 답변으로 이행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제 비트겐슈타인 평전을 읽으며 다시 그 오래된 질문을 끄집어 낸다.
[참고로 비트겐슈타인은 톨스토이와 디킨즈는 존경했지만, 셰익스피어는 존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유를 보면, 셰익스피어는 단지 경탄을 자아내는 은유와 비유에 능할 뿐 '한 명의 위대한 인간과 접촉한다는 느낌'을 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란다. 비트겐슈타인은 셰익스피어가 '시인의 운명에 대해 사색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고 했다.]
이 책은 철학적 평전 중 수작으로 널리 알려진 책이다. 명불허전이라더니, 읽으며 계속 감탄했다. 절대로 요약할 수 없는, 한 천재의 삶을 온전히 담았다. 평전을 관통하는 주제는 비트겐슈타인이 스스로에게 얼마나 엄격했는지, 그리고 그 때문에 지인들이 얼마나 경탄했으며 또한 고통스러웠는지이다.
몽크의 서술과 평가를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는 왕래한 편지와 비트겐슈타인이 남긴 비밀 메모였다. 이런 자료가 없었다면 결코 전해질 수 없었던 이야기들이 이 책에 훌륭하게 복원되어 있다. 그런데 몽크가 아닌 다른 이가 이 자료에 접근할 수 있었다 한들 이렇게 잘 쓸 수 있었을까? 스스로 철학자였던 몽크는 그저 유려한 문장가가 아니었다.
평전을 열면, 세기말 비엔나의 지적 분위기를 묘사한 몽크가 바로 두 명의 유대인에게 우리를 데려간다. 칼 크라우스와 오토 바이닝거이다. 몽크는 오토 바이닝거의 세계관과 자기부정이 비트겐슈타인의 인격을 형성한 결정적 요인이었음을 주장한다. 나는 그 주장에 완전히 설득됐다. 크라우스의 유대인 주류융합론과 바이닝거의 자기파괴적 부정이라는 두 개의 뿔 사이에서, 비트겐슈타인은 '기질적으로' 후자에 끌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과연 모든 것의 시작이었을까? 평전에서 비트겐슈타인의 반현대주의, 반유대주의, 동성애경향, 여성혐오, 성과 사랑의 구분 등을 확인할 수 있는데, 나는 과연 그랬으리라 생각했다.
비트겐슈타인이 케임브리지에서 프레게, 러셀, 케인즈, 무어 등에게 입은 은덕은 대단했다. 그러나 그가 댓가로 돌려준 비판, 비난, 배신, 혐오를 보면 (이게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책의 요점이라면 요점이다. 몽크는 평전의 헌사로 오토 바이닝거의 <성과 성격>에서 "논리학과 윤리학은 근본적으로 같다. 그것들은 자신에 대한 의무일 뿐이다"라는 구절을 선택했다), 그것을 단지 천재성의 그림자라고 간주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의 천재성을 누구보다 먼저 갈파했던 러셀은 그가 '정밀하지만 편협하다'고 생각했으며, 심지어 불쌍히 여겼다. 정당한 평가라고 본다.
인간사도 재미있지만, 배경도 그렇다. 읽는 내내 흥미를 끌었던 것은 20세기 초 케임브리지의 학풍에 대한 묘사였다. 러셀, 케인즈, 무어, 램지(!) 등이 등장하는 장면들이 가장 재미있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학비와 연구비를 지급하기 위해 오가는 설왕설래도 그랬다. 비트겐슈타인은 광적으로 논리와 언어에 집착했지만, 종교와 사랑에 대해서 무방비적이었으며 그에 대해 속수무책이었다. 반면 정치와 역사에 대해서는 순진해 보일 정도로 단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역시 천재성의 징후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인성의 불완전함의 증거로 삼아야 할지 모르겠다.
러셀도 그랬지만, 여러모로 그와 정 반대 였던 것으로 보이는 이가 있다. 케인즈다. 그 역시 현명했다. 또한 비상한 정치적 감각과 비전을 가졌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케인즈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해 "이 어린 아들은 ... 젊음의 천재성을 잃기 전에 또는 편리함과 관습에 빠지기 전에 나머지 가족에 대한 중년의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러시아에서 뭔가 좋은 것은 구하려는 사람들에 공감한다."라 말했다. 이에 비해, 비트겐슈타인이 보였던 친소비에트적 행위는 일종의 소아병에 가까운 신앙처럼 보인다.
비트겐슈타인이 한때 피력했던 반유대주의야 말로 연구대상이다. 몽크가 암시하듯이 그는 결국 또 다른 바이닝거였던 것일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상처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혹시 그는 자신의 핏줄을 거부할 수 있으리라 (잘못)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유대인' 비트겐슈타인이 모든 것을 알고도 남을 시절에 다름 아닌 히틀러처럼 생각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놀랍다.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는 역시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서 그가 선택했던 행동이다. 1차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오스트리아 군에 입대해서 사병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그는 말했다. "오직 죽음만이 인생에 의미를 준다." 전선에서 전투를 겪으면서 이렇게 썼다. "무섭다. 죽을까 두려웠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방하자, 그는 제국의 유대인 신분으로 살 수 없다고 생각했고, 39년 영국 시민권을 얻었다. 런던이 폭격을 받는 동안 그는 가이 병원에서 약국 배달원으로 일했다.
어느 종교도 믿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종교적으로 살았던 비트겐슈타인. 어떤 종교 의식에도 참여하지 않았지만, 결국 죽고 나서 가톨릭 장례를 치른 비트겐슈타인. 그의 종교관이 니체의 <적그리스도>에 묘사된 다음 주장과 유사하다는 몽크의 제언은 매우 훌륭하다. 결국 기독교란 어떤 명제나 주장에 대한 신념이 아니라 행동 뿐이라는 니체의 주장과 그 주장대로 실제로 살았던 이의 인생이 나를 울린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한 믿음에서 기독교의 뚜렷한 특징을 찾는 것은 불합리할 정도로 옳지 못할 일이다. 오직 기독교적 실천, 즉 십자가를 위해 죽었던 그가 살았던 것과 같은 인생을 사는 것만이 기독교적"이다.
다음 구절들은 특유의 '비트겐슈타인적' 스타일을 보인다. 음미해 보면, 그가 많은 글을 남기지도 않았던 이유가 저절로 드러난다. 그는 어디까지나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위대한 학자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선지자에 가깝다. 그런데 그가 스스로 자신의 교의를 배신하고 그 자신의 의도에 반해서 너무나 자주, 너무 많은 것에 대해 요점을 전달하려 했으며, 그 자취가 남아 현대 분석철학을 이룬다.
1. 말함과 보임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그의 집착: 논리적 형식은 언어 안에서 표현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어 자체의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어 안에서 분명하게 '보여진다'. 마찬가지로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진리들은 비록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인생 안에서 스스로를 분명하게 나타낸다.
2. 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는가? 그가 좋아했다던 울란트의 시 <Count Eberhard's Hawthorn>를 보면 알 것도 같다.
3. <논고>와 <탐구>사이에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로 알려진 의미 검증주의는 사실 엄격한 의미에서 '검증주의'는 아니었던 셈이다: 한 명제의 의미를 결정하기 위해서, 나는 언제 그 명제가 검증된 것으로 간주되는지에 대한 아주 구체적 절차를 알아야 한다. (나중에는 검중도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학습이나 교육을 통해서도 '의미의 확인'이 가능함을 말한다).
4.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방법론: 죽은 형태를 찾아내는 수단은 수학적 법칙이다. 살아 있는 형태를 찾아내는 수단은 (유비를 통한?) 유추이다. 4-1. 아름다운에 대해서는 원인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전에는 생각해 보지 않았던 연결관계를 보여줌으로써 아름답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5. 그의 삶에 대한 자세를 드러내는 편지의 한 구절: 우리가 살아서 서로 다시 보게 되면 파헤치는 것을 피하지 말자. 자신이 다치는 게 두려운 사람은 정직하게 생각할 수 없다. 나는 이것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나도 그런 회피자이기 때문이다.
6. 말의 내용과 효과가 요점이 아니라는 그의 사상을 담아내는 또 다른 사례: 유머는 기분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래서 만일 나치 독일에서 유머가 없어졌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사기가 나쁘다거나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더 깊고 중요한 것을 의미한다.
7. 그리고 다음은 비트겐슈타인이 내게 남긴 다른 화두. 과연 그럴까? 데이빗슨의 논지를 따라,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일 사자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탐구 II>, 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