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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웅 Nov 16. 2018

김삼봉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2015년 8월 28일

김상봉 교수의 <기업의 누구의 것인가(2012)>를 읽었다. 이 책이 대단하다는 소문을 들은 적 있기에 오래 전부터 읽고 싶었고,  많이 기대했던 책이다. 마침 일이 밀리고 마음에 괴로운 일이 생기려는 터라 도피삼아 읽기 시작했다. 


실망이다. 나는 원래 읽다가 실망하면 집어던지지도 못하고 끝까지 읽다가 조용히 저주하며 무시한다. 그래서 서평이고 뭐고 있을 수 없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괴로움이 격해져서 이리저리 다른 책을 찾아서 읽었기에, 생각해 보니 그것도 미덕이라 할 수 있는지라 같이 읽은 책들과 엮어서 이렇게 쓴다. 결국 잊기 위해 쓴다. 


김상봉 선생의 문제의식은 좋다. 그는 독일 유학시절부터 기업을 폴리스로 볼 수 없겠냐는 도전적 문제의식을 가졌다. 노동자를 노예처럼 부리고, 사원을 자원으로 남용하는 기업을 보며 기업을 민주적으로 통제할 방법이 없을지 고민했다고 한다. 고민과 궁리 끝에 그는 주장한다. 아테네에서 시민이 장군을 선출했듯이 이제 사원이 사장을 선출하면 된다고. 자본주의 회사 내 계약관계를 민주주의 체제 내 대표관계로 전환해야 한다는 용감한 주장이다. 


나는 궁금했다. 왜 주주가 이사진을 선출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원이 사장을 선출해야 하는지 (주주에게는 배당하면 된단다), 무슨 이유로 사원에게 사장 선출권을 부여할 수 있는지, 선출된 사장은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아니 출마한 사장후보는 무엇을 주장하며 선거에 나설 수 있는지. 결정적으로 재산권에 근거한 권리와 계약에 근거한 권한이 어떻게 '선거'라는 권력의 위임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 그러나 이 책에서 답변을 찾을 수 없다. 김삼봉은 주장의 근거와 타당한 추론이 필요한 곳에 자신의 상념과 비유를 제시할 뿐이다. 


김상봉 선생은 ‘베를린 필하모닉 단원이 지휘자를 선택하듯, 사원이 사장을 선출하자’는 주장을 반복한다. 그러나 이 ‘-하듯 –하자’식의 유비적 주장을 그럴 듯하게 들리게 만들려면 많은 보완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베를린 필하모닉은 지배구조, 서비스의 사회적 성격, 단원의 전문직주의, 주된 고객의 관여성 등 매우 특수한 회사인데, 특수 사례에서 보편 명제를 도출하려면, 해야 할 일이 많은 것이다. 그런 작업이 없이 주식회사가 베를린 필하모닉이 하듯이 하면 된다고 반복하면 ... 그냥 난감해질 뿐이다.  


아마 자본주의 기업의 소유권(과 그로부터 파생하는 경영권)이 일종의 ‘시민적 권리’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 같다. 그러나 이 책 어디에도 부르주아 시민권의 형성에 대한 설명과 시민의 재산권과 관계에 대한 논의를 찾을 수 없다. 이 책은 심지어 핵심 개념인 사원의 사장선출권이 왜 권리인지조차 정당화하지 않는다. 논의 중 ‘주주는 주식회사의 주인이며 아니다’거나 ‘사장은 경영의 주체이면서 아니다’, 또는 ‘그러므로 현행 주식회사의 소유 및 경영의 논리는 모순이다’는 식의 명제까지는 일단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원이 사장을 선출해야 한다’는 결론을 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김상봉은 헤겔과 칸트에서 받은 영감을 이용해서 일종의 ‘대응의 원칙’, 즉 권력형성을 위한 규칙을 만들 경우 해당 규칙에 영향 받는 자의 동의를 받아서 만들어야 한다는 원칙의 한 버전을 제시한다. 여기까지는 좋다. 그러나 이 원칙을 기업의 내부지배에 적용하려면 소유권에 민주적 지배의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는 정도의 교량적 원리가 필요하며, 이 원리 또한 별도의 정당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정당화를 찾을 수 없다. 


김상봉 교수가 아니더라도 자본주의 재산권이 민주주의 시민권보다 강력한 현실을 우려하는 이들이 많다. 보울즈와 진티스(Bowles & Gintis, 1986)가 그랬다. 이들은 고전적 자유주의이든 케인지언이든 소유권과 시민권의 갈등을 타협적으로 조정하면서 모순을 회피하는 데 성공했다고 진단한다. 여기에서 모순이란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로운 거래가 노동에 대한 계약에 근거한 사유를 넘어선 일상적 지배가 되는 현실을 의미한다. 이런 조건에서 경제가 성장할수록, 자유거래와 무역이 강화될수록, 금융지배가 생활세계에 파고들수록 노동자이자 시민인 개인의 권리가 근본적으로 제한된다. 보울스와 진티스는 자유주의는 물론 맑스주의도 이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음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 바 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도 보울스와 진티스 역시 신통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생활세계의 밑바닥까지 민주적 원칙을 적용하자 주장하고, 시민에 대한 설명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하는 정도이다. 결국 모든 수준에서 민주주의를 강화하자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경제도 민주화해야 하나? 아니 그럴 수 있을까? 보울스와 진티스의 주장은 많은 영감을 주지만, 구체성 있는 대안적 프로그램을 형성적으로 제시하지 못하며, 현실에서 강력하고 정의로운 정치가가 그 대안 프로그램을 추진한다고 해도 성과가 있을지 알 수 없다. 



결국 시민권과 재산권의 갈등. 이게 문제다.  


근대적 시민권과 재산권은 헤어져 따로 자란 일란성 쌍생아 같다. 태생은 같지만 성격이 사뭇 다르다. 부르주아 융성기에 이 둘은 모두 배타적 전유의 속성과 더불어 적극적 형성적 성격을 지닌다. 시민권은 전제권력으로부터 자유라는 소극적 자유와 더불어 권력형성적 참정권과 같은 적극적 자유를 함축한다. 재산권은 배타적 전유의 근거 그 자체이며 동시에 상업적 교환과 자본주의 생산의 기초가 됐다. 그런데 재산권의 행사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질문이 하나 있다. 재산 소유자는 왜 그저 소비하지 않고 투자하거나 사업을 할까? 즉 도대체 왜 자본가가 되는가? 열정 때문일까, 이익 때문일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서 제기된 문제(즉 시민권과 재산권의 갈등)의 핵심에 다가설 수 있다고 본다.  


투자와 창업이 없으면 기업 활동이 없고 따라서 고용도 없고 노동도 없기에, 이 질문은 일종의 시원적 질문이기도 하다. 베버는 이에 대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로 답변한 바 있다. 요컨대 구원을 기다리는 금욕적 개신교도가 현세에서 생활방식을 합리화하면서 형성한 직업윤리가 일하는 자산가를 만들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베버의 설명이 자본주의 융성기의 집합적 심성의 형성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허쉬만(Hirschman, 1977/1994)은 <열정과 이해관계>에서 ‘돈벌이의 정치적 성격’을 들어 설명한다. 즉 경제적 행위의 정치적 함의에 주목한다.


허쉬만은 상업 및 사업 활동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의미의 변천을 겪었는지 탐색한다. 중세에 돈벌이란 천박하고 불결한 것이며, 비범하지 않은 자들의 저열한 삶의 방식이었다. 우월하거나 고귀한 자는 돈벌이에 나설 필요가 없었다. 원래 가진 것을 누리거나, 부족하다고 느끼면 약탈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18세기 새로운 세계관이 이 전자본주의적 영웅적 세계관을 대체했다. 새로운 세계관은 천박하고 불결하고 평범한 돈벌이의 정치적 성격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했다.  


상업적 교역과 약탈적 산업이 발흥하는 시대에 고결한 군주의 열정은 더 이상 영웅적 미덕이 아니다. 군주의 열정은 불안정하며 변덕스러운 요인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정치적으로 위험하다. 예컨대, 군주의 열정으로 인해 불안정한 국제관계에서 나라가 위기에 빠진다. 군주의 열정은 “감사할 줄 모르고, 수다스럽고, 위선적이며, 비겁하고, 탐욕적”이다. 반면 상업과 산업에 종사하는 자의 ‘이해관계’는 조용하고 부드럽고 안정적이다. 즉 그것은 정치적으로 안정적이다. 심지어 바르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이해관계는 거짓을 말하지 않기(Interest will not lie)” 때문이다. 열정을 제어하는 새로운 힘, 즉 이해관계가 새로운 세계관을 구성한다. 


고전적 자본주의 형성기에 상업적이거나 산업적 이해관계는 예측가능한 행위, 즉 합리적 행위의 기초가 되었다. 이 침착한 욕망은 부드럽고, 평화롭고, 해가 되기는커녕 이익을 창출한다. 이성과 열정의 세계가, 이성과 열정 그리고 이해관계의 세계로 변화했다. 이해관계 개념을 이용해서 개인의 경제적 이익 추구가 어떻게 정치적 질서의 형성을 만들어 내는지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이 고전적 정치경제학의 세계관이다. 불안정한 열정과 연약한 이성이 아닌 이익이 정치적 안정을 이끌어 낸다. 그러나 이 생각은 딱 이때뿐이었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시기에 세계를 관찰했던 이론가들은 그때 이후 도저히 같은 생각을 유지할 수 없었다.  


예컨대 아담 스미스는 이해관계란 일종의 열정, 그것도 번영과 발전뿐만 아니라 사치와 부패를 유발하는 열정 중 하나로 보았다. 이익 추구는 욕망의 표현일 뿐이다. 이런 욕망은 경제적 번영을 낳을 수 있을지언정 정치적 질서를 형성할 수는 없다. 그가 제시한 ‘보이지 않는 손’이란 정치적인 손은 아니었던 것이다. 허쉬만은 아담 스미스의 이런 논의가 당대 ‘일반 대중’의 불안정한 요구, 즉 부르주아 시민계급의 요구에 주목했기 때문이라는 날카로운 분석을 덧붙인다. 아담 스미스를 거쳐 고전 이후의 시대로 넘어가는 자본주의는 더 이상 산업과 상업의 발전이 정치적 안정의 기초가 된다고 보기 어려운 정치적 혼란을 겪는다. 그리고 그 역사가 계속됐다. 자본주의의 고전기 이후 그 누구도 감히 경제로 정치를, 또는 정치로 경제를 해결하거나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언정 증거하지 못했다.


(참고) 허쉬만의 <열정과 이해관계>를 번역한 김승현 교수의 해제 중에서. ‘봉건적 잔재가 강력하게 남은 국가에서 자본가 계급이 독자적으로 발전하지 못해서 미성숙한 자본주의가 된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지만, 반대로 전자본주의적 잔재가 남아있지 않아서 모두가 비차별적으로 부르주아 시민성을 갖게 된 결과 사회분화의 원천인 다양성이 적어지고 결과적으로 다수에 의한 폭정의 위험을 겪는다는 분석도 있다.’ 미국이 후자의 경우에 해당한단다. 글쎄, 두고 볼 일이다. 



김상봉 (2012). 기업의 누구의 것인가. 서울: 꾸리에. 

Bowles, S. & Gintis, H. (1986). Democracy and capitalism. New York: Basic Books.

Hirschman, A. O. (1977/1994). The passions and the interests. 김승현 (역), 열정과 이해관계. 서울: 나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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