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9일
너무 웃기려 애쓰는 민망한 연출을 몇 번 보이는 것을 제외한다면 이 책은 정말이지 나무랄 데가 없다. 유쾌하게 전개하는 모험게임 같은 책이다. 77개의 장을 하나씩 읽을 때마나 과제가 등장하고 그 과제를 해결할 때마다 마법사로부터 ‘생각의 도구’를 득템한다. 득템하는 재미로 모험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덧 이 시대의 가장 험준한 성에 살고 있는 용가리에 다가갈 수 있다. 멀리서 보기에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용가리의 정체가 알고 보니 오랬동안 알고 지냈던 이웃이라는 느낌!
책의 주제는 심각하고도 심오하다. (1) 인간의 몸과 의식 간 관계의 본질, (2) 의식의 질적 성격의 정체, 그리고 (3)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자유 의지의 가능성이다. 각 주제에 대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이 고민해 온 바를 생각해 보면, 이를 엮어서 한 권의 책으로 쓰겠다는 저자의 의도가 무모해 보일 지경이다. 그런데 대니얼 테닛은 각 주제에 대해 논쟁적이며 영향력있는 책을 한 권 이상 쓴 본격 철학자이고, 이 책에서는 그 심오한 주제들을 엮어서 하나의 길 위에 제시한다.
데닛이 제시한 길이란 ‘사고 실험(thought experiments)의 길’이다. 그는 사고 실험을 ‘직관 펌프’란 괴상한 이름으로 부르는데, 이는 관련된 변수를 통제한 상태에서 결정적으로 의미있는 차이를 만들어 내는 변수만을 가지고 만들어 낸 이야기들이다. 이 책은 데이빗슨의 ‘늪사람’, 썰의 ‘중국인 방’, 잭슨의 ‘색채학자 메리’,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등 잘 알려진 것부터 그가 만들어낸 새로운 것들까지 무수한 ‘사고 실험’을 제시한다.
그는 특히 사고실험을 수행할 때, 이야기에 담긴 그 요점이 아닌 다른 손잡이를 돌려볼 것을 권고한다. 원래 제시된 사고실험의 핵심 변수(이것이 이야기의 줄거리를 구성한다)가 아닌 다른 숨겨진 변수의 작용을 검토하라는 것이다. 그는 이 방법을 사용해서 썰의 ‘중국인 방’이나 잭슨의 ‘색채학자 메리’ 이야기가 사실은 결함이 있는 사고 실험이며, 원래 주장에 반하는 생각을 도출하는 데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제시한 사고 실험 중 압권은 33장에 등장하는 ‘두 검은 상자’이다. 이는 처칠랜드 등이 제시했던 ‘제거주의 유물론(eliminative materialism)’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다. 제거주의 유물론이란 ‘의식의 작용에 대한 설명은 모두 신경생리학 등 과학으로 환원될 것이며’ 따라서 ‘정신작용에 대한 일원적 유물론만 남을 것’이고 주장한다. (두 검은 상자가 뭔지는 직접 읽어봐야 ... 도저히 한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없는 교묘함이 있기에)
데닛 역시 제거주의 유물론자와 마찬가지로 의식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과 신경과학의 통속 심리학에 대한 승리를 믿는다. 그러나 그는 지향계에서 작용하는 의미론적 설명의 틀을 완전히 물리적 과정에 대한 설명으로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요점을 ‘두 검은 상자’란 사고실험으로 전달한다. 이 사고 실험은 제한된 것이기는 하다. ‘의미론을 필수적인 구성부분으로 갖는 인과적 연결’을 예시할 뿐 의식을 갖는 신경체계가 바로 그런 체계라는 주장을 뒷받침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 사고실험 한 방으로 의식에 ‘제거주의 유물론’이 제거할 수 없는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예시한다.
데닛은 놀라운 비유의 천재다. 그가 생각하는 의식이란 일종의 가상 기계 위에 놓인 가상 기계와 같은 것이다. 하위 가상 기계는 신경세포를 단위로 하는 물질적 기초를 갖는다. 이 신경세포의 프로그램은 단백질이란 나노 로봇이 결합해서 형성된 것이며, 그 자체가 세포 수준의 마이크로봇을 움직이는 일종의 가상 기계라 할 수 있다. 이런 가상 기계가 결합해서 지향적 태도를 갖는 행위자성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진화를 통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따라서 신경세포 수준에서 작용하는 가상 기계가 곧 ‘의식적 작용’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가상기계들이 모여서 작용하는 체계인 뇌와 그것을 지닌 인간이 의식적 기능을 수행하도록 진화했다. 단백질과 세포가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별 세포들이 활발하게 상호작용 하는 뇌의 체계는 의식적 작용을 하는 가상 기계를 구현할 수 있다. 간결하고도 통찰력있는 비유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데닛은 또한 자아가 ‘무게 중심 같은 것’이라고 한다. 무게 중심이란 원자나 분자적 수준의 설명이 아닌 수학적인 허구의 개념이듯이, 인간의 자아도 개인의 행동과 신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허구일 뿐이다. 그러나 개인의 행동을 설명하는 허구다. 즉 ‘서사적 무게중심’이다. 이는 내가 아는 자아에 대한 가장 명료한 통찰력을 주는 비유 중 하나다. 물론 비유만으로 검증할 수 없다. 그러나 의식이나 자아에 대한 결정적 검증이 없는 동안 좋은 비유라도 감사할 일이다.
데닛의 성품과 자세를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 있다. 그는 양자역학이 어딘지 역겹고 방향이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단다. 따라서 양자역학을 공부해서 반박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양자역학의 수학을 익힐 수 없어서, 노벨상 물리학자인 머리 겔만의 비판적 책을 읽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문득 묻는다. 자기가 정말 겔만의 책을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그저 양자역학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을 뒷받침하기에 그 책을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회의주의자만이 지식의 토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데닛은 끝임없이 의심할 것을 권고한다. 따라서 나도 묻는다. 나는 데닛을 이해하고 있는가? 그저 내 선입견을 뒷받침하기에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좋아라 하는 그의 주장이 이 책의 7장에 실려있다. 결정론적 세계에서 자유의지의 가능성에 대한 장이다. 흔히 개인 행위의 책임성의 근거는 자유이며, 자유는 흔히 ‘달리 행동할 수 있었다’는 결단 시점의 비결정성으로 개념화된다. 데닛은 도덕적 책임성의 근거인 자유가 반드시 결정론적 사고를 배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는 슬쩍 물리적 결정론과 비결정론 여부와 관련이 없는 ‘도덕적 능력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이것만으로 자유의지를 정초할 수 있음을 비춘다. 만약 도덕적 능력이 진화적 적응의 결과이고, 인간의 뇌가 어떤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작용하든 관계 없이 이 적응능력이 작동하는 상황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의식에 대한 유물론이나 도덕에 대한 진화론을 받아들이고도 도덕적 삶을 살 수 있다.
이 책에서 데닛은 엄밀한 생각의 수법이 흥미로울 수 있으며,중요한 사안에 대해 흥미롭게 말하면서 요점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또한 한 사안에 대해 대학생에게 이해를 구하듯이 말하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격률을 전하며 이 책에서 그 격률을 실천한다. 그리고 ‘유용하게 틀릴 것’을 권고한다. 진정한 철학자라면 ‘틀리지도 못하는’ 안전지향형 연구자를 경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대처럼 굴어서는 곤란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