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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웅 Nov 16. 2018

그랜드 투어: 설혜심(2013, 웅진)

2013년 5월 14일

여수 언론학회에서 읽던 책. 그냥 던져 놓기 아쉬워 몇 자 적어 보았습니다.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해외 교양학습 여행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다.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 흄, 로크, 스미스, 보즈웰, 존스, 볼테르, 괴테 등 등장인물들 덕분에 읽는 내내 즐거웠다. 여수 언론학회에 가는 길에 읽으려 샀던 책이고, 기대가 컸었다. 기대는 대체로 충족되었지만, 페이지를 다 넘긴 후 애초에 가졌던 호기심 보다 더 많은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1) 16세기 이후 유행이었던 영국 내 ‘문화유산답사’와 18세기 해외 ‘교양유학’은 연속적 현상인가, 구분된 현상인가? 해외로 나가게 된 것이 ‘민족성의 자각과 자성’에 기초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2) 귀족, 대부르조아, 지식인 중 결국 누가 주도했으며, 누가 최고의 수혜자인가? 물론 각자 다른 이유로 그랜드투어에 참여하고 각자 득실이 있었겠지만, 요점은 그랜드투어 때문에 결국 영국 계급문화가 어떻게 변화했다는 것인가? (기록을 남긴 이 중에 귀족은 별로 없었다는 관찰(90쪽)을 보면, 역시 부르조아나 지식인들이 여행에서 뭔가 얻고자 한 바도 많았고, 실제로 얻은 바도 많았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추측해 볼 수 있겠다.)


(3) 결국 영국에서도 18세에 정치적으로 (적어도 사교계에서) 성공하기 위해선 외국물을 먹었어야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외국물을 먹지 않은 자들은 어떤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던 것 같다 (318쪽). 그렇다면 역시 영국인들의 ‘영국적인 것’에 대한 자부심은 이런 경험을 통해서 역으로 강화되었던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는 본원성의 형성구조에 대한 흥미로운 확증사례를 제공한다.


새로 배운 흥미로운 사실들이 많아 좋았다. 예를 들어, 킷캣클럽이나 딜레탕티회 등 런던 사교클럽의 형성이 해외유학파들의 모임이었다는 사실. 런던의 에서 보았던 그림의 주제와 구도가 일종의 여행 증명사진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영국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음악미술의 저열함은 대륙문화에 대한 순수한 동경에 기초한다는 생각 [사실이 아니네] (반대로 독일은 동경이 아니라 거절이어서 광란의 낭만성이 터졌을 수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지점에서 주제가 쓱 바뀌는 느낌이라서 아쉬웠다. 그랜드투어와 영국내 정쟁의 관련성, 차별적 계급문화의 형성, 영국에서 세계시민주의의 등장 (?) 등 가장 중요한 주제가 등장했다 싶으면 간단한 사례에 대한 기술을 거쳐서 다음 주제로 넘어가 버린다.


또한 흥미로운 주제이기는 했지만, 나라별로 대상별로 병렬적으로 반복되는 듯 해서 지루해지는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던 차, ‘국민성 인식’의 형성에 대한 논의를 거쳐서 이원복의 ‘먼 나라 이웃 나라’ 식의 논의로 이어져서 또 나를 놀라게 했다. 독일은 이렇고, 불란서는 저렇고, 이태리는 식의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이 제시된다. 영국인들이 다른 민족을 이해한다는 듯 평가하듯이, 다른 민족도 또 다른 민족들을 이리저리 평가했으리라. 여행은 이해를 낳지만, 또한 오해를 낳고, 사실은 모든 이해가 오해의 일종이라는 깨달음도 낳겠지. 오해의 끝이 세계시민주의의 시작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랜드 투어의 성과를 소개하면서 (가) 유학의 득과 실, (나) 조기 유학의 시점, (다) 대중 교육에 대한 귀족의 경멸 등을 이야기할 때, 너무 한국 현실과 유비성을 강조해서 서술한 것 같아서 쓴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이런 류의 고민과 논란은 언제나 어떤 식으로나 있었겠지 싶기에 더욱 그랬다. 흠, 최치원과 원효는 당나라에 가는 편이 역시 좋았던가? 언제 갔어야 했나? 20세기 초 조선의 평안도 출신들이 대거 현해탄을 건넜던 것에 대해 서울내기들은 뭐라 생각했을까? 예나 지금이나, 여기나 저기나 이런 고민이 없었을까 싶다.


몇 가지 의혹이 드는 부분도 있었다. 예를 들어, 순례자가 팔머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명은 순서가 반대가 아닐까? 종려나무를 가져 온 자들에서 순례자가 유례되었다니. 팔머가 순례자(pilgrim)에서 유래된 이름이며, 순례자는 외래인에서 나온 라틴 pelegrinus 에서 유래된 것이 아닐까?


몇 가지 재미있는 점 부기.


- 120쪽: 영국 위그들은 베네치아를 영국의 정치적 모형으로 여겼을 것. 실제로 베네치아 공화국 체제가 이상적인지에 대한 영국내 논쟁이 있었으며, 초기의 위그적 베니치아에 대한 열광적 찬양을 사그러들고 방종한 문화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지기도 했다는 지적.


- 150쪽: 영국 젊은이들의 매너와 대화술에 대한 갈망. 세련된 대화술을 배우기 위해서라도 여행은 필수적이었다는. 노버트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이 생각나는 구절들.


- 176쪽: 터키 여행 동호회 - 디방클럽. 이탈리아 여행 동호회 - 딜레탕티회. 1768년 조슈아 레이놀즈를 원장으로 한 왕립미술원 설립에 딜레탕티회 기여.


- 266쪽: 위그들은 역시 라틴 국가의 열등함을 가톨릭 탓으로...


- 348쪽: 런던 하이드팍 수정궁 박람회. 계급별로 입장 요일이 달랐음. 그러나 결국 계급별로 입장만 달랐을 뿐, '같은 것'을 관람한 셈. 토마스 쿡, 철도와 증기선을 이용한 대규모 관광 사업의 시작. 특히 1855년 파리 박람회 여행에 대거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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