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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웅 Nov 16. 2018

그리스인 조르바

2012년 9월 3일

기말고사 전날 밤에 수호지를 꺼내 읽는다. 원고 마감을 앞두고 일리아드를 펼쳐든다. 이건 반복되는 질병인가 형벌인가. 연기된 데드라인을 어기고 또 어기는 나는 노신을 읽다가 양심의 가책을 참지 못하고 집어던졌다. 그리고 카잔차키스의 오래된 소설을 다시 꺼내 들었다.   


이전엔 눈에 안 띄었던 부분이 보인다. '발효된 사루비아 술'이라니 (이건 꼭 마셔 보고야 말리라). 화자는 단테를 읽지만, 전에는 말라르메도 좋아했단다 (이게 말이 되나). 그리고 돼지 새끼 요리가 계속 언급되는데, 이걸 애저라고 번역해도 될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읽어도 조르바는 아직도 생명, 욕망, 상식의 화신이지만, 그리고 그래서 찾아 읽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니체와 베르그송에 대한 설교를 담고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즐거웠다. 그리스 사회당의 거두이자  연립정부의 정무장관이기도 했던 카잔차키스는 생 철학의 설교자였던 것이다.  


소설의 전개에 따르면 과부의 ***과 마담 오베르탕의 ***이 전환이자 갈등의 해소인데(스포일러 ***로 처리), 다시 읽어보니 이건 그럴 수밖에 없었는 진행인 걸로 보인다. 이 소설의  동은 전개에 있는 게 아니다. 바흐의 통주저음과 같이 밑에 갈리는 조르바의 이야기와 푸념에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이 끝나야 의미가 드러나는 끝에 있다. 이 조르바라는 인물은 실존인물이엇던 것이다.  


다음 구절들에 밑줄을 쳤다. 

  

- 사람을 구하는 유일한 길은 남을 구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 음식은 피로 변했고 세상은 더 아름다워 보였다. 우리 옆에 앉은 여자는 시시각각 젊어졌다.

- 베를린 박물관의 렘브란트. 전사.

- 할아버지는 마을을 떠난 적이 없었다. 칸디아나 카네아도 가보신 적이 없다. '왜 그 먼 곳까지 가? 이곳을 지나는 칸디아와 카네아 사람들(그들에게 평강을)이 내게 오는데. 내가 뭣 하러 거기까지가?

- 하느님은 인부들도 굽어 살피고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소. 내가 사람을 믿는다면, 하나님도 믿고 악마도 믿을 거요. 그거나 그거나 마찬가지니까.

- 집은 일견 텅 빈 것 같지만 이 안에 필요한 건 다 있는 걸 보면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것은 별로 많지 않나 보다. 

- 낡은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그 세계는 존재한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 오르게 삼촌, 나는 쑥쑥 자라나는 뿔이예요. 그게 참 기뻐요. 나는 놀랐다. 인생이란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 

- 즉석에서 나는 신화를 만들어 내었다. 나는 신화를 만들어 내는 족족 스스로 믿었다.

- 산다는 게 말썽이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꺼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 

- 여자란 건 목소리에 사족을 못 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기야 여자가 사족을 제대로 쓰는 데가 없지요. 

- 힘이 세고, 돌아도 나보다는 더 돌았겠죠. 

- 그래 거지 같은 바빌로니아의 그리스 인이여. 언제 유럽의 젖줄에서 떨어져 나오나. 

- 당신에겐 하느님 같은 젖은 스펀지가 있습니다. 쓱삭쓱삭. 

- 한 단어 한 단어 정복해가며 나는 위험에서 벗어나 무럭무럭 자라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나는 겨우 말을 바꾸어 놓고 그것을 구원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 옛날 성자들처럼 당신 입에서는 글씨가 가득 쓰인 리본이 줄줄 새어 나오고. 그렇지요? 어때요? 

- 고향도 마찬가지예요. 한때 몹시 그리워 해서 그것도 목젖까지 넣고 토해 버렸지요. 그때부터 고향생각이 날 괴롭히는 일이 없어요. 

- 조국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 하느님은 악마 대장보다 반거충이 악마를 더 미워합니다.

- 내게 젊음이 있다면 젠장 콘스탄티노플도 단숨에 쓸어 버릴 수 있을텐데.

- 변화무쌍하고, 요령부득이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그러나 마음대로 안 되는 무자비한 인생.

- 나는 외국으로 나가야 해요. 내 배 속에 든 염소라는 놈이 아직 종이를 더 씹어야 성이 차겠대요. 

앤쏘니 퀸이 열연한 영화, <희랍인 조르바>를 보면, 화자가 반영-반희랍 작가로 묘사된다. 그리고 조르바는 미국에 가본 적 있다고 말한다. 둘은 광산 사업에 대한 이야기 끝에 동업한다. '희랍인 조르바'가 '영어가 되는 희랍인 조르바'가 되는 순간이다. 주요 등장인물 둘이 영어로 대화하는 상황을 그럴 듯하게 만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도입한 설정이다.  (1/4 아이리쉬, 3/4 멕시칸인 앤쏘니 퀸은 어떤 인종이라고 해도 믿을 만하다. 그의 연기는 25시의 요한, 루마니아 농부로 정점을 찍는다. 눈썹만 다듬으면 한국인이라 해도 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되어서는 근대 희랍의 고난과 모순을 고민하는 화자의 성격이 무너지고 만다. 마찬가지로 마케도니아, 불가리아, 터키를 방랑하다가 결국 아토스 산과 불가리아를 거쳐서 러시아에 정착한 조르바의 역정도 어쩐지 사소해 진다.  


카잔치스키는 이야기의 출발로 숲 요리를 떠올린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둘의 만남은 '이야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산투리를 들고 있는 조르바에게 '그게 뭐냐'라고 물으면 그는 특유의 너스레로 이야기를 시작할 텐데, 이게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다. 터키인 스승에게 산투리를 배우게 된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야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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