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아홉 싱글 생존기>
“나 어떻게 생각해?”
“... 응?”
“나 여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갑자기 왜, 왜 그래... ”
하아... 그렇다. 봄바람도 불고 마음이 영 싱숭생숭했던 것이다. 게다가 곧 마흔이다. 조급한 마음에 그에게 '고백공격'을 때려 부어 버렸다. 창피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나란 사람인 것을.
나이가 들어 좋은 점 중 하나는 포기와 인정이 빠르다는 사실이다. 열심히 좋아하고 공들여 고백까지 했지만 내가 아니라는데 뭐, 별 수 없다. 좋은 점이 또 있다. 포기가 잦으니까 선택과 집중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예전처럼 쓸데없는 곳에 힘을 빼지 않아도 된다. 가령 불필요한 약속은 굳이 나가지 않는다거나, ‘어떻게 그럴 수 있어?’하던 모든 일에 그저 ‘그러려니’ 하고 심드렁해질 수 있다거나.
연애도 마찬가지다. 어렸을 땐 '세상 모든 남자들이 다 나를 좋아해 주었으면' 같은 말도 안 되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고, 모두들 나를 밝고 착하고 인기 많은 아이로 봐주었으면 했다. 미움받기 싫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행여나 거절이라도 당하면 “네가 감히?” 하며 자존심을 들먹이며 괘씸해했다.
지금은 누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냥 ‘그러려니’ 한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게 됐다고 할까. 사람의 마음이란 게 점심 메뉴 정하듯 쉽게 정할 수 없단 걸 자연스럽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만의 생각과 취향이 확고해진다. 가끔 아빠의 똥꼬집을 내가 그대로 닮아가는 걸 보면 새삼 나이가 들었음을 느끼게 되고, 내 의식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타인의 생각과 취향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쪽으로 진화하는 지도. 하지만 가끔 외로움이 지나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 때는 괜히 쓸데없는 질문에 집착한다. 결혼 적령기를 넘긴 여자는 정말 인기가 없는 걸까? ‘나이 들면 내 매력도 끝인 거야?’
'파레토의 법칙'이란 개념이 있다. 전체의 80%에 해당하는 이득은 전체의 20%에서 나온다는 뜻으로 이 개념은 연애에도 적용된다. 내 연애의 80%는 가능성이 있는 무리의 20%에게서 나온다. 10명이면 딱 2명만 나에게 관심이 있다는 뜻이고 지금은 그 근처에도 못 미칠지도.
어차피 나를 싫어하거나 나에게 관심없는 사람이 10명 중에 8명이니 나 좀 봐달라고 아둥바둥 거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의 비율을 정해져 있는데, 나와 연애가 가능한 모집단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든 것일 뿐이다. 주위를 둘러보라. 이 나이쯤 되면 대부분은 갔다니까.
그러고 보니 정말 웬만한 사람은 다 갔다. 멀쩡한 사람은 물론이고 '네가?!'라는 생각이 들만한 사람도 모두. 어렸을 때 나 좋다고 쫓아다니던 그 남자애도, 한 때 잠깐 사귀었던 그도, 소개팅 후 어딘가 아쉬워서 그만뒀던 그 사람도, 전에는 거들떠보지 않았던 그 남자조차도. 그나마 남아있는 사람이라고는 비혼, 초식남, 한참 어린 연하남 아니면 사기꾼.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에게 그만큼 물리적 시간과 정신적 여유가 늘어났다는 점이다. 전에는 연애하랴 일하랴 정신이 없었지만 이제는 스스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여유가 생겼고 그간의 연애 경험을 토대로 내가 어떤 사람이 잘 맞는지 정도는 알 수 있게 됐으니.
나는 외향적인 것 같지만 혼자만의 시간도 반드시 확보되어야 하는 내향적 외향형이다. 덩치나 목소리가 큰 남자보다 오랜 시간 함께 재잘재잘 떠들 수 있는 남자가 더 좋다. 주말에 밖에 나가서 여기저기 다니는 야외 데이트보다 조용히 집 혹은 동네 카페에서 함께 책 읽으며 대화하는 걸 더 좋아한다.
어렸을 때는 이런 걸 잘 몰랐다. 특별한 호불호 없이 그저 남자친구가 짜온 데이트 코스를 쫓아다니거나 SNS에서 ‘주말 드라이브하기 좋은 곳’ ‘OO에서 가장 데이트하기 좋은 장소’ ‘OO 맛집’ 등을 찾아다니기 바빴다.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은 즐거웠지만 집에 돌아오면 왠지 모르게 진이 쭉 빠지고 에너지가 달렸던 건, 아마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과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지 잘 몰랐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물론 그때보다 나이 들고 인기는 줄었다. 즉, 좋은 사람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들어졌다는 소리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나름의 여유를 즐기며, 이왕 늦은 거 ‘되면 좋고, 안 되면 또 어때?’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가끔 누군가 와서 내 마음을 슬쩍 떠보더라도 쉽게 동요하고 빠르게 결정하기보다 천천히 생각하고 함께 시간을 갖고 서로에게 맞는 사람인지 따져볼 수 있게 되었다.
나이 듦이란 그런 게 아닐까. 평균 점수는 점차 낮아지고 경쟁력은 계속 떨어져도 경험이 쌓이고 생각할 수 있는 여력이 늘어난, 그 자체로 엄청난 아이템이 된 것과도 같은 행운이. 만날 상대가 사라지면 어떤가, 기미가 하나 둘 늘어나면 또 어떤가. 그게 현실인 것을. 청승맞게 신세 한탄이나 하고 있을 시간에 엉덩이 툴툴 털고 일어나 조금이라도 더 멋진 여자가 되어버리는 수밖에. 문득 한 TV 프로그램에서 가수 윤종신 님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사랑을 찾으려고 하는 순간 그 사람의 매력은 떨어져요. 그럴 땐 억지로 찾지 말고 주어진 일을 즐겨보세요. 그럼 분명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이 생길 거예요. 그러니까 가장 먼저 나다워지세요.”
진짜 훌륭한 선수는 불평하지 않는다. 휘파람이나 불며 경기를 즐길 뿐이다. 나이 듦을 한탄하거나 불평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내공을 쌓아 승률 높은 캐릭터가 되는 건 어떨까? 어차피 진짜는 진짜를 알아보는 법이니까.
*배경사진 Unsplash, Ne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