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아빠가 방문을 두드리는 이유
“아이고… 이거 또 참 미치겠네…
야야, 이것 좀 봐줘 봐라. 이건 또 왜 이러는지,
나 원 참… 답답해가지고 참…”
월요일 아침, 방문 너머 아빠의 앓는 소리가 들린다.
출근 준비로 정신없던 나의 감각이 본능적으로 깨어난다. 아빠는 분명 휴대폰을 하다가 무언가 막힌 것이다. 사안은 둘 중 하나일 확률이 크다. 매일 아침 듣는 라디오 어플에 문제가 생겼거나, 블루투스 이어폰이 연결되지 않거나.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7시 10분.
다행히 집을 나서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 모든 변수를 고려해야 한다. 머릿속으로 일을 최대한 빠르게 마칠 계획을 세운다. 빠르고 신속 정확하게..!. 이번에는 스팸이 문제였다. 무료 어플을 쓰면서 종종 저절로 깔리는 스팸 어플. 간단히 제거하고 다음엔 이럴 경우 어떻게 하는지 친절하게 알려드렸다. 분명 얼마 안 가 또 물어보시겠지만…
내가 집에 들어온 후로 부모님은 하루가 멀다 하고 휴대폰을 들고 내 방문을 두들기신다.
때로는 출근길에 때로는 퇴근 후 주말, 평일 오전 오후 할 것 없이 문제가 생길 때마다 디지털 관련 민원은 끝이 없었다. 부모님에게 21세기 ‘디지털 유니버스’는 너무나 광활한 세상인 듯했고 나는 이 참의 디지털 보안관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탄생한 우리 집의 ‘디지털 민원 전담반’.
담당자는 나, 팀장도 나, 총괄도 나다. 주 고객은 부모님. 고령의 두 분이 이 방대한 디지털 세상에서 정처 없이 떠돌지 않도록 기꺼이 돕는 일을 한다. 특히 나를 자주 찾는 민원인은 아빠다. 그는 유튜브를 즐겨 보고 은행업무부터 간단한 물건 구매까지 모두 휴대폰으로 다 하신다. 이제 웬만한 건 혼자 하실 수 있을 정도로 모바일 환경에 익숙해진, 나름 고령의 디지털 유저다. 하지만 나이가 나이인 만큼 여전히 어플이나 웹 서비스를 사용에 어려움이 많이 겪고 있다.
남녀노소 상관없이 누구나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는 시대지만 아직도 웹이나 모바일 상 인터페이스는 젊은 사람들 위주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어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자주 어려운 문제에 봉착한다. 어플은 정기적으로 업데이트를 요하고 새롭게 추가되는 기능은 많고, 때에 따라 ‘앱 추적 금지 요청’이나 ‘개인정보 활용에 관한 사항’ 등은 사실 나도 잘 모르는 내용일 때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우리 집 민원인의 주된 요청 사항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 집 민원인의 주된 민원사항
1. “이건 왜 자꾸 청소를 하라는 거냐?”
: ‘네’를 무작위로 누르면서 깔린 스팸 광고 어플이다
2. “이건 왜 자꾸 멈추는 거냐?"
: 대체로 앱이나 프로그램 업데이트 중이다.
3. “인증? 뭘 자꾸 인증하라는 거냐?" :
: 결제나 송금 등 금융 서비스를 사용할 때마다 발생하는 민원이다. 아마 30번쯤 설명해 드렸겠지만 진전이 없다.
4. “추적을 허용? 누가 나를 추적해?”
: ‘아니요’를 누르면 되지만 아빠는 모바일에서 대체로 '예스맨'이 된다.
5. “이거 피싱이냐?”
: 스팸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아빠가 쓴 카드 내역 알림 문자다.
우리 집 민원인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무언가를 잘못 누르면 큰일이 나는 줄 안다.
: 아마도 터치 한 번으로 거액의 금액이 통장에서 빠져나가거나 휴대폰이 폭발할 것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다.
2. 휴대폰 터치 화면을 꾹, 오래 누르신다.
: 정전 터치 스크린을 이해를 못 하신다. 이것 역시 아무리 말씀드려도 소용이 없다. 버튼이나 다이얼식 화면에 익숙하셔서 그런 것 같다.
3. 저번에 물어본 걸 또 물어본다.
: 어쩔 수 없다
고령의 유저는 학습속도가 느리다. 반응 속도로 느리다. 그리고 반복적이다. 당연하다.
물론 가장 힘든 건 당사자겠지만 그때마다 나는 나 대로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한다. '친절과 봉사 정신으로 고객을 상담하기' '절대 짜증 내지 않기'. 하지만 반복되는 질문에 차분함을 유지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처음에는 친절한 태도를 유지하다가도 곧잘 참지 못하고 짜증을 내버린다. 덕분에 요즘 민원인을 상대하는 공무원분들의 노고에 공감하고 있는 중이다. 나의 고충은 다음과 같다.
민원 담당자의 고충 |
1. 반복적인 업무에서 오는 피로감
매일 같은 문제로 같은 상대와 씨름하다 보면 쉽게 피로해지고 성격도 안 좋아진다.
2. 24시간 대기조.
민원인은 가족이다. 따라서 매일 봐야 한다. 민원인이 만족하지 못하면, 우리의 업무는 끝나지 않는다.
3. 만족스러운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했을 때 따라오는 후회와 자책
민원인은 부모님, 부모님께 짜증을 내면 그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안 좋다. 따라서 가장 주의해야 한다.
고령자의 디지털 소외 현상은 비단 우리 집의 이야기가 아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발표한 ‘2023 디지털정보격차 실태조사’에 따르면 장애인, 고령인, 농어민 등 정보 취약계층이 디지털 정보 활용 측면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모바일 정보 역량이나 활용도 측면에서는 일반인과 큰 차이를 보였다. 특히 저소득층, 장애인, 농어민 등 취약계층 중에서도 고령층의 디지털정보화 수준은 70.7%로 가장 낮았다.
물론 이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일부 정부 및 지자체도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다.
인권위는 지난 2월 '디지털 격차로 인해 노인의 인권침해 최소화'를 위해 노인 맞춤형 교육을 실시하고 디지털기기 개발과 보급 지원, 아날로그 접근권 보장, 헬프데스크 설치 등을 권고했다. 실제 서울시는 공공시설에 ‘디지털 안내사’를 배치하고 다중이용시설을 순회하며 노인들에게 키오스크 활용법과 스마트폰 이용법을 안내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을 어디까지나 공공 위주일 뿐 실제 노인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은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 아빠가 어플 사용법을 알기 위해 매번 민원센터나 안내사를 찾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어르신들을 위한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공공기관 내 노인 업무 전담반 설치, 모바일 및 웹 사용 시 인터페이스의 간소화 및 규격화, 소프트웨어 별 노인 전용 액세스 만들기 등 현실에서 직접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고안되어야 할 것이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가 2025년 초고령화 사회가 된다고 말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 65세 이상의 인구가 전체의 20%를 차지하는, 쉽게 말해 5명 중 1명이 고령이 되는 국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준비는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모든 고령자에게 디지털 민원 전담반이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우리 부모님처럼 천하의 불효녀를 데리고 사시거나 홀로 거주하시는 노인분들이 소외 없이, 편리한 디지털 세상을 훨훨 날아다닐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참고로 나처럼 가정 내 민원인이 계신 자녀분을 위해 ‘부모님을 위한 디지털 민원 응대매뉴얼’을 만들어 보았다. 부디, 가내 평화를 빈다.
가내 고령자를 위한 미디털 민원응대 매뉴얼
1. ‘VIP 고객’ 마음가짐 장착
부모님은 중요한 VIP 고객! 웃으며 "뭐가 또 안 될까?" 하고 질문을 여쭙는 것부터 시작해요.
절대 짜증은 금지! 친절한 톤을 유지하세요.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
2. 자주 묻는 문제 모니터링
자주 묻는 문제는 메모해 두세요. 블루투스 연결? 은행 인증서? 그 문제들, 작은 문제은행에 기록해 두고 언제든지 답변 준비!
3. 은행 업무 해결: '원스텝 안내'
인증서나 은행 앱은 두려운 장벽처럼 느껴질 수 있어요. 아빠의 스마트폰 화면을 보고, 하나씩 차근차근 눌러주며 문제 해결!
4. 블루투스 연결법
라디오 연결이 안 될 때, 무조건! Bluetooth ON -> 목록에서 선택 -> 연결 버튼을 차례로 알려드리세요.
기억 못 하셔도 괜찮아요. "아빠, 이건 우리가 같이 한 번 더 하면 돼요!"라고 긍정적으로 대답해 주세요.
5. 스팸성 문자 해결: '불청객 신고하기'
스팸 문자가 오면 "이건 안 좋은 문자!"라고 알려드리고, 차단 방법을 함께 클릭!
차단이 안 되면 "이건 고객센터에 신고 접수해 드리겠습니다!"로 응대.
6. 재미있는 해결 팁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아빠, 오늘의 스마트폰 해결사!”라고 유쾌하게 마무리.
‘성공했다!’라는 느낌을 주어 자부심을 느끼게 해 드려요.
7. 내일 또 오실 걸 아는 마음가짐
매일 똑같은 질문에도 한결같이 “다시 한번 도와드릴게요!”라고 답변하세요. VIP 고객은 매일 만족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