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부는 적적하다
나이가 들수록 말수가 줄어든다. 특히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 입을 꾹 다물게 된다. 대화의 주제는 대부분 '공통사'에 한정되어 있어서,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함께 보내는 시간이 없다면 말할 거리가 거의 없다.
집에 들어와 보니 우리 부모님도 대화가 많지 않다. 두 분이 나누는 이야기는 가게 일 관련된 짧은 대화뿐이다. "어제 재료값 줬어?" 아니면 "어제 바빴는데 술은 왜 그렇게 마셨어?" 둘 다 짧게 주고받다가 금세 끊겨 버린다.
부모님의 웃는 얼굴을 최근 본 건, 조카가 놀러 왔을 때다. 이제 막 두 살이 된 조카가 엄마 품에 폭 안기자, 엄마는 너무 좋아서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아빠는 뒤뚱거리며 걷는 손녀의 작은 손을 잡고 동네를 한참 돌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누가 안아줄까?'
'아빠 손은 누가 잡아줄까?'
나는 그래도 연애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나이 든 부모님은 손녀가 놀러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손을 잡아 줄 사람도, 포옹할 사람도 없다. 게다가 내가 두 번째 손주를 안겨 드릴 가능성도 점점 희박해지고 있다. “매일 포옹을 하면 의사와 멀어진다”는 말도 있던데, 연구 결과에 따르면 포옹이나 악수 같은 신체적 접촉이 불안과 우울감, 심지어 통증까지 줄일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과 정서적인 교류를 늘려보기로 했다. 이참에 집 분위기를 좀 바꿔야겠다는 결심도 섰다. 대화 없는 가족 관계는 위험하다. 정서적 교류가 없는 가족이라면 고시원 룸메이트와 다를 게 뭐가 있을까. '당장 손주를 안겨 드릴 순 없으니 프리허그라도 해보자!' 하고 다짐했다. 웃을 일 없는 노부부에게 나는 정서적 쿠션이 되어 주고 싶었다.
‘엄마 아빠 안아주기, 사랑한다 말하기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원래 살가운 성격이 아니라, 살면서 부모님께 '사랑한다'는 말을 제대로 해본 적도 없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살가운 딸’에도 도전해 보기로 했다. 물론 하루아침에 성격을 바꿀 순 없으니, 말과 행동부터 조금씩 변화를 주기로 했다. 아래의 단계들은 부모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개선하는 데 꽤 효과적이다. 난이도가 올라갈수록 효과가 극대화되니 참고하시라. 나처럼 무뚝뚝한 자녀라면 특히 특효약이 될 것이다.
특징: 오글거려서 가려움증 유발 가능. 문자부터 천천히 도입 추천.
말끝에 '이응' 붙이기: "엄마, 어디 가세요옹~?"
살짝 올리는 톤으로 서울 사투리 느낌 살리기: "식사 하셨어요옹~?"
짧은 애교 섞기: 어쩌다 한 번 "엄마, 이거 진짜 맞죠잉?"
특징: 안 하던 사람에겐 쉽지 않음. 마라톤 뛰는 기분일 수 있음.
‘감사합니다’와 ‘죄송합니다’ 바로 표현하기
가까운 사람일수록 좋은 감정은 즉시 표현하고, 나쁜 감정은 바로 풀어야 한다. 작은 감정의 찌꺼기들이 쌓이면 나중에 펑하고 터지기 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엄마가 밥을 차려주시면 바로 "엄마, 진짜 고마워요~ 너무 맛있다!" 과장해서라도 표현하고, 설거지를 깜박했을 땐 "어머, 죄송해요! 내가 했어야 했는데. 바로 할게요!"처럼 바로 반응하는 것이 좋다.
‘사랑해요’ 연습
오글거림 주의. 아침 출근길에 톡 메시지로 보내거나 루틴처럼 시도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특징: 이걸 할 수 있다면 진짜 인정.
엄마 안아드리기
처음엔 "얘가 왜 이래, 징그럽게~" 하셨지만, 이제는 누구보다 좋아하신다. 나는 집 밖을 나가기 전, 특히 출근할 때 "사랑합니다"와 함께 꼭 안아 드린다.
아빠 팔짱 끼기
'아빠 손은 누가 잡아줄까?' 내가 아니면 아무도 없을 것이다. 팁을 하나 주자면, 특정 상황에 자연스럽게 끼워 넣으면 쉽다. 예를 들어, 가족 모임에서 식당으로 이동할 때 아빠를 안내하는 척하면서 팔짱을 끼거나 일부러 함께 산책할 시간을 만들어 보자. 처음에는 쑥스러워하시지만, 결국 누구보다 좋아하실 것이다.
특징: 자잘한 배려와 관리가 필요. 작지만 깊이 있는 디테일로 집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음.
‘엄마 마사지 타임’
엄마의 어깨와 목을 간단히 풀어 드리는 시간을 만들어 보자. "엄마, 내가 마사지해 줄까?" 하며 자연스럽게 시도한다. 스킨십도 자연스럽게 생기고 이런저런 대화도 가능하다.
아빠와의 ‘테이블 타임’ 만들기
아빠랑 TV 볼 때 옆자리에 슬쩍 앉아 대화를 시도해 보자. 단, 정치 이야기는 조심하시라. 괜히 서로 기분만 상할 수 있다.
이런 행동들을 실천하고 나니 우리 집 분위기는 정말 많이 달라졌다. 엄마는 내가 출근할 때 나보다 먼저 "사랑해, 딸"이라고 말하시고, 가족 단톡방에도 따스한 말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정도는 이제 쉽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고, 아빠도 예전보다 말수가 늘었다.
작은 실천 속에서 부모님의 소중함을 새삼 느낀다. 물론 여전히 아빠는 가끔 얼음 같고 엄마는 호랑이처럼 포효하시지만, 그마저도 사랑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가족의 의미는 더 중요해진다. 하지만 우리는 바쁜 일상에 치여, 익숙함을 변명 삼아 가족에게 소홀해지곤 한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낯설고 쑥스럽다는 이유로 미루기 쉽다. 그런데 표현하지 않으면 모른다. 말하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다. 하루라도 더 빨리, 더 많이 사랑한다고, 감사하다고 알려 주자. 오늘이 지나면 부모님과 함께할 날이 하루 더 줄어들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