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예술 혼이 담긴 도시락
엄마는 요리를 잘한다.
굉장히 잘한다. 레시피는 한 번 보면 머릿속에 들어가고, 처음 보는 요리도 척척 해낸다. 어렸을 때 나는 모든 엄마들이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엄마가 된 친구들이 해주는 음식을 맛보면서, 우리 엄마가 좀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엄마의 요리를 먹는 일이 줄어들었다. 간혹 집에 가면 엄마가 반찬을 한 보따리 싸주셨지만, 양이 많아 다 먹지 못하고 결국 버리게 됐다. 엄마의 ‘큰 손’은 작게 요리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래서인지 점점 엄마 반찬은 안 싸가게 됐고, 빈손으로 집을 오가게 됐다.
그런데 본가에 돌아와 다시 엄마의 도시락이 내 출근길에 등장했다. 처음엔 다 큰 내가 엄마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는 게 남들 보기에 부끄럽기도 해서 한사코 사양했다. 하지만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리 말려도, 출근하는 내 손에 도시락을 들려 보내는 것이 엄마의 고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도시락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아… 이 모든 것이 <편스토랑> 때문이다. 요리 프로그램 정주행한 엄마는 실로 화려한 도시락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그녀의 도시락은 예술 작품처럼 진화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셰프라도 된 것처럼 도시락에 열정과 정성을 쏟아부었다. 강된장과 닭가슴살 양배추 쌈, 비건 마요네즈 샌드위치 같은 다이어트식이 나오더니, 그다음엔 복돼지면, 참치 비빔밥, 감태전복김밥, 마장면, 파래탕면, 수란덮밥 등 온갖 퓨전 요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양이었다. 도시락이 화려해지는 만큼 양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도시락을 싸기 시작한 목적은 다이어트였는데 도시락을 먹으니 저절로 살이 찌기 시작했다. 하지만 요리가 그녀의 기쁨과 성취라는 걸 알기에 차마 거절할 수도, 남길 수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평소처럼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는데, 엄마가 부엌이 아닌 소파에서 TV를 보고 계셨다. 내가 인사를 해도 엄마는 TV만 보고 계셨다. 그제야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아뿔싸! 어젯밤 야근을 마치고 들어와 설거지조차 안 하고 잠든 내 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도시락은 반 이상 남겼다. 양 많은 도시락이 점점 부담으로 다가오자, 나는 슬슬 엄마의 도시락을 반쯤 먹고는 남기는 일이 잦아졌고, 전에는 설거지를 그때그때 해서 엄마가 몰랐는데, 이제는 알아버린 것이다.
아아, 캥거루 자녀로 사는 것이 꼭 쉬운 일만은 아니다. 가족은 상생의 관계이기에 서로가 원하는 것을 면밀하게 살펴 상대가 원하는 것을 반드시 제공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공생인 것을…! 도시락 사이에는 무언의 약속이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친구에게 고민을 토로하자 그녀가 했던 말이 있다.
“아주 복에 겨워서 배 터지는 소리 하고 앉아있네…”
엄마가 했던 명언도 떠오른다. “사람이 어떻게 지 좋은 것만 하고 사니?!”
다음 날 나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엄마를 위해 저녁을 준비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순대볶음. 맛있는 순대를 사 와 레시피를 보고 양념장을 만들어 깻잎과 함께 볶았다. 어설펐지만 꽤 맛있는 순대볶음이 완성되었다. 노력하는 내가 귀여웠는지 드시면서 한참을 웃으셨다. 엄마는 도시락을 통해 통해 나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나는 그녀의 도시락을 깨끗하게 비움으로써 그녀에 대한 애정을 표현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무언의 협약을 이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날 이후 엄마의 도시락에 변화가 생겼다. 여전히 화려하지만 양이 반으로 줄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매일 도시락을 먹을 때마다 사진을 찍어 엄마에게 보낸다.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다 비운 사진도 보내고 짧은 후기도 남긴다. 가끔 sns에도 올려 자랑한다. 지인들은 '어머니가 최고!' '복 받은 딸이네' 등의 댓글을 달아준다. 내가 메시지를 남기면 엄마에게는 간단한 이모티콘 답장이 돌아온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안에 담긴 엄마의 마음을. 그리고 그때마다 생각한다. 우리가 사소하게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많은 것을 의미하는 지를.
아직 도시락으로 찐 살은 빠지지 않았지만 엄마가 만들어 주신 도시락에 담긴 그 진심을 이제는 놓치지 않으려 한다. 서로의 작은 노력이 우리에게 큰 변화를 가지고 오는 것을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