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아홉 싱글 생존기>
별생각 없이 쫓아간 결혼식엔 어마어마하게 훈남인 남편이 서있었다. 그리 친하지 않았지만 청첩장을 받으면 가던 때였으니까. 그래도 학창 시절에는 꽤 친했고 가끔 속 이야기를 터놓기도 하는 사이였으니. 그런데 남편이 의사란다. 그것도 키 크고 훈남인 정형외과 의사. 술자리 헌팅으로 만났다는데 결혼까지 가다니. 놀랄 노자다.
이유 없이 진 기분이다. 내가 쟤보다 못한 게 뭐지? 나보다 예쁜가? 내가 훨씬 똑똑하고, 얼굴도 몸매도 내가 더 난 것 같은데. 매일 공부도 안 하고 술만 마시던 얘가? 집안이 좋았나? 아니 뭐 딱히 잘하는 게 있었던가?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
나랑 연락 안 하고 지내는 사이 성형수술이라도 한 건가? 로또에 당첨된 건 아니겠지?... 경기가 시작된지도 몰랐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다들 이미 저 앞에 있다. 나는 멀어져 가는 이들의 뒤꽁무니만 쳐다보며 멍하니 서 있다. 뭐지, 이 찝찝한 기분은. 다들 시집만 잘 가는 것 같다. 나만 빼고.
제대로 된 직장을 갖게 된 후로 줄곧 결혼이 나의 가장 큰 목표이자 숙제였다. 남자들이 좋아한다는 교사가 됐으니 결혼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소개팅을 열심히 하다 보면, 하다못해 어른들이 소개하는 선이라도 잘 보면 누구든 만나겠지. 자상하고 능력 있고, 나만 사랑해 주는 그런 남자.
그래서 그냥 배운 대로 했다. 열심히. 뭐든 열심히 하면 된다고 했으니까. 수험생 시절 엉덩이에 땀띠 날 때까지 앉아서 공부만 했던 것처럼, 임용고시를 볼 때 화장실도 안 가고 공부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열심히만 하면 다 될 줄 알았나 보다. 그렇게 죽어라 하다 보니 소개팅만 100번, 썸은 뭐 말할 것도 없고 연애도 꽤 많이 했다.
그런데 마흔이 다 되도록 나는 여전히 혼자다. 완전히 진 기분이다. 아니 졌다. 별생각 없었던 친구들은 시집만 잘 가서 행복하게 사는 것 같은데 토끼 같은 아들 딸 낳고 잘만 사는 것 같은데 나만 왜 이모양이야. 왜 여전히 혼자고 결혼 근처에도 못 가있는 거야. 도대체 왜, 왜. 열심히 했는데 왜 지기만 하는 건데.
시작도 못해보고 패자가 듯한 느낌이 든 건 이뿐만이 아니다. 학창 시절 팽팽 놀기만 하던 친구는 아나운서가 되고, 모델이 되고, 나랑 과방에서 허구한 날 술만 마시던 친구는 대기업에 떡 하니 붙고, 졸업 후 할 거 없어서 대학원 간 친구는 잘난 남자한테 시집만 잘 가더라.
맨날 술 마시고 놀고, 인생 한탄만 하고, 별 볼일 없는 것 같더니 네가 이렇게 먼저 간다고? 왜? 도대체 왜? 나는 부모님이 절대 안 된다는 재수까지 하고, 한창 좋은 나이에 수도승처럼 공부만 했는데 어떻게 이래, 인생이 뭐 이 따위야.
친구가 얼마 전 둘째를 낳았다. 떡두꺼비 같은 아들에 토끼 같은 딸까지 서울에 사는 4인 가족. 그림이 그럴듯하다. 둘째는 또 왜 그렇게 예쁜지, 인형이 따로 없다. 별 볼일 없는 것 같던 남편은 뒤늦게 시작했던 스타트업이 대박 났고 본인도 얼마 전 누구나 알 만한 외국계 회사로 이직했다. 집안일은 이모님이 도와주신다. 결혼할 때 큰 고민 없이 샀던 집이 크게 올라 여자 처자 돈을 불려 얼마 전에는 꼬마 빌딩까지 샀단다.
열심히 살기 싫다며 일찍이 금수저 집에 시집간 지인은 오후가 다 돼서야 일어난다. 나는 매일 미라클 모닝 한답시고 5시 반에 일어나는데. 그녀는 일어나서 늦은 아침을 먹고 쇼핑을 하러 가거나 마사지 샵에 간다. 주말에는 남편과 골프를 치러 필드에 나가고 시간이 나면 승마도 한다.
심심하면 집에서 그림을 그리고 블로그에 팔기도 한다. 얼마 전엔 백화점 오픈런에 성공해서 산 시계로 5000만 원을 벌었다고 자랑까지 했다. 주식도 깨작거리는 거 같은데 내 월급보다 많이 번다. 원래도 돈 잘 버는 남편이 비트코인으로 대박 나서 20억이 넘는 집을 샀다. 나는 하루도 안 빠지고 8시간씩 꼬박꼬박 일하는데.
학교에 다닐 때부터 백치미로 이름을 날린, 이른바 별명이 '텅텅'이었던 지인은 부모님이 차려준 카페가 터졌다. 매일 스토리에 가게 사진을 올리는데 사람들이 줄을 섰다. 커피 한 잔을 팔아도 머리가 좋아야 하는데 저렇게 멍청했던 얘가? 학교 다닐 때 영어 단어도 잘 못 읽던 얘가? 아아,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공부하지 말고 실컷 놀 걸.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말 걸.
친구가 잘 되면 축하해줘야 한다는데 축하가 안 된다. 부러워 죽겠다. 나는 한 없이 작아지고 찌질해 진다. 에라이, 이럴 때는 술을 마셔야 한다. 카톡을 한참 뒤져봤는데, 세상에나 연락할 사람이 없다. 집에 가서 맥주나 한 잔 해야겠다. 역시 술은 혼술이지. 몽롱한 기운에 정신을 차려보니, 세상이 오히려 조금 더 뚜렷하게 보이는 것 같다.
모든 게 경쟁이라고 생각했는데. 모든 건 싸워서 이겨내는 거라고.
내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를 짓밟고 일어서야 하는 거라고. 지금까지 내가 겪은 세상이 그랬으니까. 내가 얻은 건 모두 누군가를 이겼을 때 주어졌다. 반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야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고 대학에서도 남들보다 좋은 학점을 받아야 취업이 가능했으니. 어렵게 패스한 임용고시 80:1의 경쟁률이 의미하는 것은 내가 적어도 79명을 제쳤다는 것을 말했다.
내가 남보다 연애를 많이 한 것도, 그가 보기에 내가 다른 여자보다 뛰어났다고 해석했다. 내가 남들보다 열심히 꾸미고 운동도 하고 잘 맞춰주니까, 내가 조금이라도 더 나니까 연애도 잘할 수 있는 거지. 죽어라 열심히 노력해서 타인 위에 서면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공식이 정말인 줄 알었건만.
그런데 인생은 경쟁이 아니었다.
시집 잘 간 친구는 대학시절 언제나 친구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컨디션이 어떤지, 오늘 기분 상태가 어떤지에 상관없이 공강 시간에는 늘 친구들의 고민상담을 자처했고 때에 따라 커플매니저 역할도 했다. 그 친구 덕에 결혼한 친구들만 세 커플이 넘는다. 잘난 남편도 아마도 그녀의 따뜻한 마음씨에 반해 결혼을 결심한 것이리라.
일찍이 빌딩주가 된 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다. 늘 쾌활하고 기개가 크며 자신감이 넘쳤고 대학 때부터 남들이 두려워한다는 해외 취업도 여러 차례 다녀오고 덕분에 해외에서 장사도 했다. 남들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성격 탓에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자신에게 강한 확신이 있었고 그래서 처음에는 반대했던 현재 남편과 결혼도 밀어붙일 수 있었으리라. 남들이 힘들다는 육아를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것도, 집이 떠나가라 우는 아이를 보고 ‘아이가 우는 것은 정상’이라며 쿨하게 달래는 그녀를 보고 나도 많이 배웠다.
부잣집으로 시집가서 편하게 사는 지인은 젊은 시절을 희생한 덕분이다. 한창 클럽 다닐 나이에 유부녀가 됐으니 여전히 신나게 놀고 있는 친구들이 부러울 만도 한데 쉽게 내색하지 않은 게 기특할 정도다. 하나를 포기해야 하나를 얻을 수 있다는 걸 아는 거겠지. 결혼생활이란 어떤 것인지, 무엇을 놓고 무엇은 절대 놓으면 안 되는지 알려준 것도 이 친구였는데. 일찍이 남자가 딴짓할 것 같으면 초장에 잡아야 한다는 사실도(웃음).
부모님 덕에 카페를 차린 지인은 남들이 노는 날도 쉬지 못한다. 뭐든 자기 손을 거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덕분에 쉬는 날에도 카페에 나가 직접 커피를 내린다. 그냥 넘어갈 만한 것도 사장 눈에는 다 보이고 직원들이 아무리 잘해도 온전히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그녀가 그저 놀면서 돈을 벌고 있지 않다는 걸 의미한다.
남들 놀 때 일하고, 남들 일할 때도 일한 덕분에 그나마 이 정도라도 살고 있다고 말했던 게 어렴풋이 생각난다. 덕분에 나는 자기 사업을 꾸린다는 것이 일찍이 자영업자가 되는 삶이 어떤 것인지 간접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구나’ 알게 된 것도 모두 이 친구 덕분이다.
“그래도 난 네가 제일 부럽다”
나보다 편하게만 사는 줄 알았던 친구들이 나만 보면 이구동성 말하는 게 하나 있다. 너는 아직 혼자고, 그래서 자유롭고, 가능성이 무한하고 게다가 멋지다며. 우와, 세상에. 나는 너희들이 모두 경쟁자라고 생각했는데. 너네를 이겨 먹으려고 그렇게 아등바등거렸는데. 한 번뿐인 인생의 판에서 나는 이미 너네보다 한참 뒤처져서 속상하다고 말하려던 참인데, 아니 그것조차 자존심 상해서 마음속에 꾹꾹 눌러놓고 있었는데 내가 부럽다니.
그러고 보면 인생은 참 재미있다. 경쟁인 줄 알았던 경기가 단 번에 끝나기도 하고 나가리인 줄 알았던 판에서 손쉽게 이기기도 한다. 어쩌면 삶이란 애초에 경쟁이 아닐지도. 모두 각자의 삶이 있고 나름의 고충이 있는 것을. 다들 묵묵히 하다 보니, 어쩌다 보니 그나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임을 왜 이 나이를 먹어야만 알 수 있는 건지.
세상이 아무리 불공평하다지만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고 무엇보다 나이가 들수록, 경험이 쌓일수록 인생은 경쟁 보다 심포니 오케스트라 같은 것임을. 나만 지는 것 같아 억울하다가도 조금만 틀어보면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면이 나에게 있고 지금 당장 좋아보는 게 후에 꼭 좋다는 법도 없다. 다들 각자의 레이스에서 고군분투하며 사는 게 인생임을 마흔이 다 돼서야 깨우치고 있다.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으면 조금은 덜 억울해하고 사람들에게 더 친절하게 대했을 텐데.
인생이 버겁고 힘들 때마다 삶은 경쟁보다 협업이라는 사실을 상기한다. 지금은 당장 너무 어렵고 힘에 부치더라도 다들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산다고. 다들 그저 열심히 자신의 래인을 묵묵히 달리고 있는 경주마라고. 남들에게 집중하는 대신 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주변을 돌아보며 베풀고 살다 보면 남이 아닌 나를 극복하는, 좋은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그래서 아직은 살만 한가 보다.
*배경 사진 Unsplash, Youssef Abdelwaha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