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아홉 싱글 생존기>
퇴근이다!
오늘은 치킨에 소맥이라도 한 잔 하고 싶은데.
참나, 만날 사람이 없네?
도대체 퇴근 후 다들 뭐 하길래 그렇게 바쁜 걸까? 결혼한 친구들은 아이 하원 때문에, 남편과 바통 터치하러, 시부모님이 올라오셔서 등등의 타당한 이유로 바쁘다. 나는 잔소리할 남편도, 하원시킬 아이도 없어서 그런지 자주 외롭고 더 자주 쓸모없다.
누구든 불러내길 포기한 나는 결국 4개에 12000원 편의점 맥주를 덜렁덜렁 사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혼술의 좋은 점은 혼자서 멍 때리며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번은 혼자 술을 마시다가 ‘나는 왜 착한 남자가 좋을까?’는 라는 질문에 꽂혀서 ‘착함이란 뭘까?’에 대해 생각하다 반나절이 다 갔고 어느 날은 유튜브를 보며 맥주를 마시다가 양자역학에 빠져 영혼이 시간과 공간을 탈출했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가끔은 정말 망상에 빠지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나는 전생에 조선시대의 왕자였다. 수려한 외모와 명석한 두뇌로 아바마마와 궁녀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중 우연히 궁 밖에서 만난 노비의 딸과 사랑에 빠지고 만다. 나는 그녀와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도망쳤고 아무도 없는 산골에서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산다. 그 후 80년대 서울, 평범한 가정의 둘째 딸로 태어난 나는 서른아홉쯤엔 놀 사람도 한 명 없이 아주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갑자기 비참한 내 모습에 짜증이 솟구친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전생의 업보를 견뎌내고 있는 중이니까. 한 나라의 왕이 될 사람이 사랑에 빠져 나라까지 저버렸으니 나는 지금 벌을 받고 있는 중이다. 하아,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사실 난 종종 침울해지는 나를 끌어올릴 묘안을 몇 가지 더 가지고 있다. 좀 부끄럽지만 이 자리를 빌려 몇 가지만 풀어볼까 한다.
첫째, 나보다 더한 놈을 찾는다.
나는 남을 짓밟고 일어났을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아주 못된 인간이다. 그래서 내 인생이 똥통 같다고 생각이 들 때면 더 똥통 같아 보이는 사람을 찾아내어 제단에 올린다. 비교는 가끔 매우 유익하기 때문에 주로 나보다 더 못한 놈을 찾는다.
예를 들면 친하지도 않은데 결혼식에 불러놓고 신혼여행 갔다 와서는 일언반구 연락도 없고, 말도 없이 쌩인 친구. SNS에는 잔뜩 럭셔리한 신혼여행 사진을 도배해 놓고는 카톡하나, DM하나, 그 흔한 댓글 하나 안 달더니. 현재는 남편과 별거 중이라는 소식이 떠돈다. 아아,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또 있다. 어렸을 때 잘난 척 다 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날 차더니 지금은 무슨 90년대 잊힌 아이돌처럼 이도 저도 아닌 인생을 사는 것 같은 전남친의 SNS를 훔쳐 보다 알 수 없는 승리감에 빠진다. 그의 눈가 주름을 정확히 세가며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할까.
둘째, 죽음의 신을 소환한다.
나는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미워한다. 만일 과학과 운명이 도와준다면 100살까지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끔 정말 너무 외로워서 혼자 지구 멘틀 끝까지 갔다가 돌아올 때면 ‘어차피 다 죽을 텐데 뭘’하는 생각을 함께 끌어올린다.
내가 말도 안 되는 짓을 해도, 외로워서 죽을 것 같아도 어차피 다 죽을 텐데 뭘. 외로운 사람도 안 외로운 사람도 행복해 죽겠는 사람도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도 어차피 다 죽을 텐데 뭘. 부자도 나처럼 가난한 사람도 어차피 뭐 죽을 텐데 뭘.
못생긴 사람도 예쁜 사람도 어차피 다 죽을 텐데 뭘. 날 사랑한다고 해놓고 떠났던 그놈도, 환승연애로 부글부글 끓게 했던 그 자식도 어차피 다 죽을 텐데 뭘. 그런 생각을 하면 차가웠던 마음이 좀 뜨뜻해진다고 할까. 언젠가 영국 가수 빌리 아일리쉬가 했던 인터뷰가 떠오른다.
“나는 언젠가 죽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도 결국 다 죽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져요. 그럼 이번 생에는 무슨 짓을 해도 되잖아요? 어차피 다 죽고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할 텐데”
캬야, 역시 멋지다.
셋째, 내가 '짱임'을 상기한다.
나는 아주 자주 침울해지는 사람이다. 가끔은 침울함이 나를 살린다는 생각이 들 만큼 나는 숨 쉬듯 아주 자주 침울하다. 하지만 그래서 내가 짱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자주 침울해지기도 쉽지 않은데 그런 면에서 나는 정말 짱이다. 이렇게 맛있는 걸 못 참기도 쉽지 않은데 그런 면에서는 내가 또 짱이다. 이렇게 한번 결심해 놓고 빠르게 철회하기 쉽지 않은데 나는 정말 짱이다.
퇴근 후 SNS만 보다 잠들기도 쉽지 않은데 그런 면에서 나는 정말 짱이다. 20년 연애만 하고도 결혼 못한, 아니 안 한 나는 그런 면에서 정말 짱이다. 축의금은 그렇게 많이 해놓고 평일에 만날 사람 하나 없는 나는 정말 짱이다. 몸무게가 한 달 사이에 이렇게 왔다 갔다 하기도 힘든데 그런 면에서 나는 정말 짱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타기도 쉽지 않은데 그런 면에서 나는 짱이다. 변덕이 몇 번씩 휘몰아치는 것도 다 내가 다 짱이다.
이렇게 나만의 '짱 목록'을 늘려가다 보면 내가 정말 이 짱인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내 세상에서 짱 먹으면 되겠다 싶다.
삼십 대 미혼의 퇴근 후 일상은 대략 이렇게 정리된다. 놀 사람도 만날 사람도 없어 심심함과 외로움에 몸서리치다가 쓸데없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이상한 상상을 하고, 애써 나를 위로하기 위한 괴상한 처방전을 내놓는. 근데 뭐 다들 그렇게 사는 게 아닌가. 때로는 한심한 내 삶을 조소하고 때로는 대단한 나를 북돋으며. 그렇게 미혼의 하루가 저문다.
*배경사진 Unsplash, Antoine 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