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아홉 싱글 생존기>
과연 갈 수 있을까?
내일모레 마흔. 여전히 싱글. 비혼주의 아님. 마음이 심란하다. 어떻게 ‘만 나이’에 좀 기대 볼까 했는데 큰 의미 없다는 걸 깨달았다. 30대 10명 중 4명이 미혼이라는데 40대가 되어서는 1.7명이 미혼이다. 마흔이란 이런 거였나. ‘저 인간 도대체 누가 데려가나’ 하던 빌런 선배도 마흔 전에는 가던데 나는 과연 언제 갈 수 있을까?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고 하던데 근 10년 사이 나도 참 많이 달라졌다. 아기를 싫어하던 내가 100m 앞 유모차만 봐도 엄마 미소가 절로 퍼지고 돈 쓰는 곳도 바뀌었다. 예전에는 쇼핑이나 술자리에 월급 대부분을 탕진했다면 이제는 공허한 시간을 채울 알량한 취미활동과 피부과에 지분을 쌓는 중이다.
종교는 없지만 보톡스의 효과를 맹신하고 항산화제에 비타민, 철분과 마그네슘까지 안 먹는 약이 없다. 가장 듣기 좋은 말은 ‘동안이시네요’, 가장 싫어하는 말은 ‘연장자 먼저’. ‘누나’라는 호칭은 아직도 적응이 안 되고 초면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언니’라고 부르는 MZ들을 응징하고 싶다. 나보다 어리고 예쁜 친구들을 보면 이유 모를 질투가 들끓고 어디서든 나이부터 까는 한국문화는 반드시 고쳐야 할 구시대적 관습의 표상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마흔을 세상일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나이라고 했는가. 나는 하루하루 가출하듯 도망가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매일 아침 명상에 자기 암시, 요가로 바닥난 에너지를 가까스로 채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주문 외우듯 ‘나는 행복하다’고 외치고 이제 외로움과 초조, 조급함은 친구가 되었다.
엄마는 시집 못 간 딸 덕분에 박애주의자가 되었다. 남자는 잘 보고 만나야 한다던 그녀는 누구든 일단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우선 만나란다. 평소 무뚝뚝한 아빠는 지금도 나만 보면 “그때 말했던 그 박사장 아들 말이다…”라며 운을 띄우신다.
왜 그렇게 따졌을까?
그때는 젊음이 무슨 벼슬인 것처럼 콧대가 하늘을 찔렀다. 아아, 나의 전성기여. 나의 리즈시절이여. 내가 무슨 드라마 속 여주나 되는 줄 알고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사장님 아들이라도 짠! 하고 나타날 줄 알았나.
젊음이 영원할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남자들이 나를 좋아해 줄 거라 믿었다. 결혼이란 그저 20대 연애하듯 ‘해야겠다’ 마음먹으면 언제든 할 수 있는 건 줄 알았다.
나에게 꼭 맞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지구 어딘가에 잃어버린 퍼즐처럼 나에게 딱 맞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괜찮은 남자들은 다 어디 갔을까. 정녕 바람직한 싱글남은 씨가 마른 건가. 나는 어느새 극단적인 연하남과 꼬이는 유부남, 돌싱과 꽃중년 사이에서 애매한 위치가 되어버린 걸까.
어떤 모임을 가든 괜찮은 남자를 찾아 촉수를 세우고 염불에는 뜻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 있는 주책맞은 내 모습도 참 별로다. 요즘 세상엔 결혼이 옵션이라던데 해당 없는 나는 그냥 꼰대인 걸까. 매일 밤 스멀스멀 밀려오는 잡생각과 공허함, 매년 찾아오는 명절과 기념일에 대한 공포, SNS에서 쿨한 척하기 등 싱글로 사는 것도 쉽지 않다.
다들 어떻게 사는 걸까?
혼자인 사람들은 혼자라서 행복해 보이고, 함께인 사람들은 함께라서 행복해 보인다. 나는 그사이 어디쯤 끼여서 하루는 행복하고 하루는 불행하다. 결혼한 친구들은 자유로운 내가 부럽다는데 나는 니들이 더 부럽다. 나도 이제 그만 자유롭고 싶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엄마 말처럼 아무것도 모를 때 갈걸. 역시 어른 말 하나 틀린 거 없는 걸까.
그래도 시집가고 싶다. 아니, 가야겠다. 남들 다 가는데 내가 못 갈 일이 뭐 있겠는가. 정말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으니 못 믿는 척 믿어볼까. 이쯤에서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 보자.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사람이 오도록. 우리는 반드시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중요하니까 두 번 더 반복한다.
우리는 반드시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배경사진 Unsplash, Patrick Schnei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