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아홉 싱글 생존기>
혼자 사는 건, 다 좋은데, 심심하다.
나이가 드니 놀 사람이 없다. 육아에 바쁜 내 친구들이 들으면 한참을 욕하겠지만, 싱글의 삶이란 아무리 바빠도 혼자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운동하고 책 읽고 영화 보고 빨래에 청소, 온갖 집안일에 이렇게 글까지 써도 분명히 남는 시간이란 게 생긴다. 이 자투리 시간에는 주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아무것도 안 하는 이 시간에 아무나 좀 있었으면 좋겠다.
자기 개발서에서는 ‘혼자 있는 시간’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정말 혼자 있게 되면 오히려 둘의 중요성을 체감한다. 혼밥이 아무리 편해도 혼자 먹으면 대부분 맛이 없고, 혼술은 그냥, 좀 궁상맞다. 혼자 하는 쇼핑은 효율적이지만 취향을 나눌 사람이 없어 섭섭하고 혼자 가는 커피숍은 아무리 좋아도 오래 있지 못한다. 혼자 하는 운동은 몸짱 만들기엔 최고지만 영 재미가 없고 혼자 보는 영화는 끝나면 늘 허무하다.
혼자 살면 혼잣말이 느는 만큼 말수가 줄고, 공간에 관심이 커지지만 함께 누릴 사람이 없다. 누군가와 함께 살 때는 그렇게 혼자 있고 싶더니, 혼자 있으니까 누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니까. 삶이란 이런 걸까? 해야만 하는 건 하기 싫고 안 해도 되는 건 하고 싶어지는.
서른아홉 나이의 인간관계란 좁고 느슨하다. 꼭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반드시 만나야 하는 사람도 없다. 평소에는 그렇게 약속 잡기가 귀찮은데 문득 술 한 잔 하고 싶은 날에는 연락처를 아무리 뒤져봐도 정작 연락할 사람이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거창한 약속이 아니라 아무 때나 전화해서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말할 딱 한 사람인데 말이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도 어려워진다. 학창 시절 친구들이야 언제 봐도 좋지만 ‘그땐 그랬지’ 추억팔이도 가끔 해야 제맛, 매일 하다 보면 꼰대들의 막말 잔치로 끝나거나 필름이 끊기거나 둘 중 하나다. 이제 각자 가족도 생기고 사는 곳도 달라지면서 전에는 ‘모여!’하면 우르르 모였던 친구들도 점차 시간을 내야만 볼 수 있는 사이가 된다.
졸업하고 만나는 친구들은 직장이나 지역, 취미, 육아 등 공통 관심사로 모이지만 교집합이 사라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공중분해 된다. 회사 다닐 땐 그렇게 막역했던 직장 동료 선후배도 이제는 SNS ‘좋아요’로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됐으니 말이다.
가족은 책임의 다른 말이다. 나이 들면 왜 그렇게 챙길 날이 많아지는지, 부모님 생신, 결혼기념일, 어버이날, 어린이날, 신정, 구정, 크리스마스, 추석까지 그 많은 날을 다 챙기다 보면 시간도 에너지도 돈도 많이 든다.
미혼인 나도 이렇게 챙길 게 많은데 결혼하면 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날을 챙겨야 할까? 게다가 이 많은 행사들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건지, 나이가 들수록 챙겨야 할 날이 늘어난다는 건 기쁘면서도 슬픈 일이다.
그래서 나는 연인이 좋다. 연인은 ‘좋아하니까’ 혹은 ‘사랑하니까’라는 말로 모든 것이 프리 패스 되는 마법 같은 관계로, 이 말에는 제약도 설명도 필요 없다. 이토록 복잡하고 피곤한 세상에서 이유가 없다는 건, 아마 종교와 부모 자식 다음으로 절대적인 게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렇게 무능할 수가 없다. 그 앞에서 나는 음료수 병 하나도 잘 못 따는 사람이 되고, 50kg 데드리프트를 번쩍번쩍 들어 올리면서 마트 장바구니 하나도 무거워 죽겠다고 징징거린다. 누구 앞에서 이렇게 삐그덕거리고 귀찮은 존재여도 된다니, 이런 관계가 또 어디 있을까. 어른이 되면 대가 없는 호의가 그리워지는 법이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결혼하는 걸까?
지겹도록 싸워도, 돈이 넉넉지 않아도, 시댁, 장인 장모님이 부담스러워도, 결정의 번거로움, 육아의 고단함, 아들 딸, 사위, 며느리도 모자라 엄마 아빠라는 책임감을 감내하고도, 종족번식과 사회 번영, 공공의 선을 따지지 않더라도, 결혼이 손해인 이유가 차고 넘치더라도 그래서 사람들이 꾸역꾸역 결혼을 하나보다.
혼자가 아니어도 되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고 뭘 해도 귀엽다고 해주는 내 편이 옆에 있으니까.
이 널따랗고 광활한 우주에 그래도 '내 사람, 내 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게, 어디 가서 매일 같이 자랑할 일은 아니어도 소소하고 든든할 테니까.
삶은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반복인 것을, 인생 역시 SNS 속 그럴듯한 사진 보다 실수로 찍힌 연사에 가까운 것을. 이 지긋지긋한 일상의 반복을, 실수로 찍힌 연사 같은 별 볼 일 없는 생에 격렬히 끼어들어서, 언제든 이 힘겹고 지루한 일상을 함께 버텨내고 싶어서.
*배경 사진 Unsplash, Tolga Ulk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