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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서운합니다

by 다현 Feb 2. 2025

무언가 마음 상하는 일이 있을 때 자신의 감정을 차분히 설명하고 상한 감정을 상대와 대화로 풀어가는 사람을 보면 어른스럽게 느껴진다. 진정한 어른이란 솟아오르는 감정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기보단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문제(마음 상하는 일)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행동을 보이기 마련이니까.


그렇다. 나는 어른스럽지 못하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가족이나 친구로부터 마음이 상할 때 내가 느낀 감정을 전달하고 사과를 요구하거나 오해를 풀기 위해 애쓰기보단 '삐치는' 편이고 '꽁해있는' 쪽을 택한다. 상대가 독심술의 소유자도 아니고 내 마음을 속속들이 꿰뚫어볼 수 없는 노릇인데 이런 상황에 놓이면 유아적인 기질이 발동한다. 어떻게 가족이! 어떻게 친구가! 내 마음을 이리도 몰라줄 수 있나!! 하는 서운한 마음과 구구절절 설명하는 구차함을 보이기 싫다는 이유로 입술이 삐죽나온다. 감정이 상하기 전과 후의 온도차가 극명하게 달라져 가까운 사람은 '또 삐졌네' 알아차릴 수 있는 수준이다.


네이트판 같은 온라인 커뮤니티에 연인 혹은 친구의 이런 행동이 짜증난다며 일종의 뒷담화 글이 올라오면 같이 짜증을 내주다가도 이내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러워진다. 모두가 비난하는 커뮤글의 주인공이 나인 것만 같아서 소위 찔리는 것이다. 일종의 거울치료 타임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자주 내보이는 '꽁함'이 제삼자에겐 이런 식으로 비치는구나, 다음부터는 절대 이러지 말아야지. 하지만 자기반성은 그때뿐. 다시 비슷한 상황에 놓이면 어김없이 꽁함 모드가 켜지고, 후회하고, 시간이 지나 반성하고, 다시 꽁하고... 반복이다.


인간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핵심 열쇠가 대화라는 사실을 잘 안다. 대화로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며 숱한 교류의 시간을 통해 관계의 층위가 두터워지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 관계 사이의 대화는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기를 드러내기. 느끼는 바를 표현하기.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까.


남녀 사이엔 '애정표현'의 빈도와 강도로 사소한 충돌이 빚어지기도 한다. 눈빛만 봐도 마음이 통하는 사이여도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은 말로, 행동으로 표현해야 한다. 그게 애인 사이의 매너이자 일종의 연애 의례(?) 일지도 모르겠다. 굳이 말로 떠들어 서로가 가진 애정을 확인하고 안도하고 만족하는 행위. 알면서 굳이 눈으로 귀로 확인받는 그런 거.


남녀 사이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상대를 아끼고 신경 쓴다는 사실을 굳이 말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기분을 느끼고 그런 말을 해주는 상대에게 특별함을 느낀다. 오고가는 표현을 통해 조금씩 싹트고 더욱더 긴밀해지는 사랑과 우정...!


이렇게 잘 아는 나는 왜 그럴까. 평소 상대를 향한 애정을 드러내기는커녕 왜 지금 느끼는 기분을 말로 표현하지도 못하고 그 대신 입술을 삐죽 내밀고 꽁한 티를 팍팍 낼까. "이러저러 해서 서운하다" "이러저러해서 마음이 아팠다" 입 밖으로 털어놓는 게 왜 이렇게 어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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