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꿈은 패션 디자이너였다. 중학교 때는 영어 통역가를 꿈꿨고, 고등학교 때는 방송국 PD가 되고 싶었다. 대학교 초년생 때는 다양한 뮤직비디오를 보며 뮤직비디오 감독이 되는 미래를 그렸고, 졸업반 때는 현실에 발을 붙이고 눈을 확 낮춰 방송작가를 준비했다.
이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지금은?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해 오후 5시면 퇴근하는 성실하고 지루한 '사무직 회사원'의 삶을 살고 있다. 이상하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지루하기 짝이 없는 회사원의 삶을 단 한번도 꿈으로 키워본 적이 없는데. 나는 어쩌다 지루한 사무직 회사원의 삶을 살게 되었을까.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무엇이든 그려 넣을 수 있을 거란 벅찬 기대감을 가졌던 때가 언제였지. 무궁무진하게 펼쳐질 무한대의 미래를 앞에 두고 뭐부터 할까 설레던 때가 있었나 헤아려보면 그저 까마득하다.
그냥, 뭐랄까.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부터 복잡한 미로를 맞닥뜨린 기분이다. 그래서 미로를 헤매고 헤매다 마침내 목표 지점에 다다랐냐고?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미로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덜컥 겁을 먹고 7세 미만 유아 전용 산책길 택했다.
일에 치여 번아웃을 겪고 과다한 업무 스트레스를 겪는 사람들이 보면 배루른 소리라 타박하겠지만 인생이 너무 쉽다. 원하는 대로 술술 풀리는 뜻의 쉽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예 도전 자체가 없고 도전이 없으니 성취 역시 미미한 일상이라 쉽다. 어렸을 적 내가 꿈꾼 미래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설 연휴에 본가에 내려가 어린시절 사진 감상이라는 연례 루틴을 반복했다. 해맑게 웃는 어린 나를 보며 소설 <비행운>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