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에 대한 기억
나는 춤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갖고 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첫 시간 국어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중학교까지는 교육의 목표가 사회에서 필요한 보통의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고, 고등학교는 좀 더 높은 단계의 지식과 인격과 체력을 갖춘 사람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듣고 학교를 졸업할 때쯤이면 내가 얼마나 멋진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 얼마나 교양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기슴이 뛰었다. 자존감이 함께 올라갔다. 학교 다니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생님은 일반적인 말씀을 하신 거였다. 당시 교육의 목표는 전인교육이었다. 한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은 지식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윤리를 지켜야 하고 몸도 건강해야 한다는 것이 그 시대의 교육 목표였다.
지금 대학 가기 힘들다고 하는데 내가 대학가던 50년 전에도 대학 가기는 더 힘들었다. 고등학교는 대학 가기 위한 관문 정도로 생각되었다. 어느 학교가 좋은 대학에 많이 보내느냐가 학교의 위상을 결정했다. 학생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했다. 아이들의 체력이 점점 떨어진다는 것이 사회적 이슈였다. 이런 사회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의 건강을 위해 우리 학교는 영어 수학 못지않게 체육 무용시간을 할애하고 몇 가지 프로그램을 시행하였다. 지금 생각나는 것 중 하나가 교내에서 시행하는 각국의 전통무용대회와 점심시간에 추던 에어로빅이었다.
학교에서는 일 년에 한 번 각국의 전통무용 경연대회가 있었다. 1학년은 학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3학년은 입시 관계로 시간을 낼 수 없으니 이 대회는 2학년이 공연을 하고 다른 학년은 대회날 관람을 하였다. 따라서 이 대회는 고등학교 시절 단 한 번 참여할 수 있었다. 어느 나라 전통무용을 선보일까 반에서 국가를 결정하였다. 2학기가 시작되서부터 반아이들은 의논을 하느라 시끄러웠다. 아이들은 멋진 춤을 선보이고 싶어 했다. 학기 초 반장이 선출되고 반에서 정식으로 회의가 열렸다. 한 아이가 프랑스의 대표적인 춤, 캉캉춤을 추고 싶다고 말했다. 반 전체 아이들이 모두 찬성했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화려한 캉캉 춤을 상상하고 아이들은 신이 났다.
캉캉춤을 추기로 하고 아이들은 시간만 나면 운동장에 모여 춤 연습을 했다. 다른 반 아이들도 시간만 나면 나와서 연습을 하기 때문에 춤추는 아이들로 운동장은 가득 찼다. 캉캉 춤의 포인트는 줄을 서서 치마를 높이 들어 올리며 다리를 하늘로 쭉 뻗는 동작이었다. 연습을 할 때는 체육복 바지 위에 치마를 입었다. 체육복 바지는 자주색 긴 바지였고 치마는 폭이 넓어 연습하기에는 제격이었다. 5~6명씩 모여 줄을 서서 치마를 잡고 다리를 높이 올렸다. 아이들은 신이 났다.
운동장에서 연습을 하던 어느 날 오후 수업시간에 교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교장선생님께서 점심시간에 운동장을 지나다 연습광경을 보시고 놀라셨다고 한다. 다 큰 여자 아이들이 학교에서 다리를 하늘로 올리는 춤을 추는 반이 어느 반이냐고 하셨다고 한다. 반장이 교무실로 불려 갔다. 한참 후에 반장이 돌아왔다. 반장이 하는 말이 우리 반이 캉캉춤을 출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 춤을 선택해야 한다고 했다. 그 이유가 캉캉 춤은 전통무용이 아니고 교장선생님께서 다 큰 여학생들이 단체로 다리를 하늘 높이 올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교장선생님은 훈화 때마다 현모양처를 강조하셨다. 현모양처 될 학생들이 어찌어찌 다리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릴 수 있냐는 것이 교장선생님의 주장이셨다. 하지만 현실은 입시경쟁이었다.). 아쉬웠지만 우리는 캉캉 춤을 포기하고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춤을 추었다.
행사의 마지막에 이벤트가 있었다. 운동장 가장자리에 반별로 모든 학생이 앉았다. 이때 운동장 가운데 턱시도와 화려한 희 드레스를 입은 한 커플이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이러한 포즈를 스페인에서 조카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운동장의 넓은 공간을 마음껏 돌며 왈츠를 추었다. 전교생이 그 광경을 보고 박수를 쳤다. 춤은 다른 사람이 추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커플 두 사람은 음악에 맞춰 운동장 전체를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었다. 주인공은 얼마나 즐거웠을까?
점심시간 운동장에서 추는 에어로빅
서울 시내 가운데 위치한 학교의 운동장은 그리 넓지 않았다. 운동장 앞에는 구령대라는 높은 단이 있다. 우리 학교는 조선시대 한양의 중심 북촌에 위치했다. 이곳은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의 오른쪽으로 옛날부터 지체 높으신 고관대작의 주거지였다. 우리 학교 자리는 조선 전기 영의정이었던 김종서의 집이었다고 하는데 검증된 바는 아니다. 학교에서 조금 올라가면 북촌 한옥마을이다. 50년 전에는 지금과 같이 관광명소가 될 줄을 몰랐다. 다만 수업시간에 굴뚝 청소를 하라고 알리는 징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우리 학교 운동장 주변에 높은 건물은 많지 않아 하늘을 보기에 불편하지 않았다. 건물은 일제강점기 지어진 건물과 현대 건물이 섞여 있었으며 김종서의 집 앞마당에 있었다는 백송이 학교의 역사와 전통을 말해주었다.
월요일 아침이면 전교생이 행진곡에 맞춰 운동장에 모였다. 1학년 2학년 3학년 한 학년에 10반 가까이 되었다. 담임 선생님께서 앞에 서시고 한 반에 두 줄 키 순서대로 섰다. 학생들로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조회순서는 정해져 있었다. 음악 선생님의 지휘에 맞춰 교가를 부르고 국민체조를 하고 그 주일의 주요 행사를 보고하고 교장선생님 훈화를 들었다.
행사의 진행은 구령대 위에서 이루어졌다. 구령대는 훈화하시는 교장선생님의 자리였고 학생은 상을 받을 때나 구령대에 올라갈 수 있었다. 모든 학생은 조회 시간 내내 구령대를 바라보고 서 있어야 했다. 교장선생님의 훈화는 지루했다. 딱딱한 조회 시간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앞에 있는 친구와 장난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그런 구령대의 위상이 달라졌다. 운동에 활기가 넘쳤다. 키가 크고 건장한 한 학생이 구령대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모든 학생이 운동장에서 그 학생 따라 춤을 추었다. 그 춤은 에어로빅이라는 생소한 춤이었다. 외국에서 들어온 운동이라고 한다. 점심시간 식사를 마친 학생들은 무조건 운동장으로 나와 구령대 위 학생의 동작을 따라 춤을 추웠다.
학교에서 입시에 지친 학생들의 건강을 위해 마련한 프로그램이었다. 학교에서 정한 지침은 강력했다. 도시락을 먹으면 모두 운동장으로 나가야 했다. 교실에 그대로 남아 있는 학생이 없나 생활지도 선생님께서 점검을 하시기도 했다. 구령대 위에서 에에로빅이 시작된 것이다. 이제까지 보아온 학교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너무나 활기찼다. 나는 구령대 위에서 건강한 몸으로 춤을 추는 그 학생과 활기찬 운동장의 광경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그 학생의 이름까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