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작가 <야마시타 카즈미>의 불가사의한 소년이 나에게 나타났다면
그 소년을 기억한다. 초등학교 1학년 8살이었을 때.
나는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못했다.
다들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부터 한글을 떼곤 했는데, 나는 한글을 제대로 읽지 못할 정도로 학습능력이 둔했다. 하루는 신나게 젤리를 사들고 집에 들어왔다. 엄마는 그런 나를 붙들고 자리에 앉혔다. 이상하리만치 엄숙한 분위기를 내뿜는 엄마 앞에 나는 숨죽인 체 앉았다. 엄마는 다짜고짜 학습지를 펼치더니 읽어보라며 단어 하나하나를 가리켰다. 받침이 들어간 단어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나에게 엄마는 옷걸이로 어깨 죽지를 때리며 단어의 원리를 알려줬다. 맛있게 먹던 젤리도 잊은 채 나는 눈물 콧물을 질질 짜면서 글을 띄엄띄엄 읽기 시작했다. 학습지 선생님이 친절히 알려주었을 때는 읽지 못했던 단어들이 매를 든 엄마를 마주하자 머리가 팍팍 돌아갔는지 단어를 하나 둘 읽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나는 많은 단어들을 읽고 익힐 수 있었다.
간신히 단어와 문장들을 익힌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런 나에게 제일 싫어하는 시간이 있었으니 바로 받아쓰기 쪽지 시험이었다. 10개의 단어를 선생님이 말하면 아이들이 답안지에 그대로 단어를 쓰는 단순한 문제였다. 보통 내 점수는 반토막인 50점이거나 평균 60점을 웃도는 점수가 대부분이었다. 하루는 어려운 단어들의 나열이었는지 1학년의 컨디션이 안 좋았던 건지 1개만 맞고 9개를 모두 틀렸다. 어렸지만 수치심에 친구들이 볼까 시험지를 가렸다.
그런데 이게 왠일인지 선생님이 이름을 한 명씩 호명할 테니 각자 받은 받아쓰기 점수를 말하라고 했다. 하필 10점 받은 날에 말이다. 점점 내 순번이 다가오자 어떻게든 창피함을 피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했다. 점점 내 이름을 부를 차례가 되자 나는 입을 열었다.
“90점이요…”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10점의 반대, 90점이라고 말하는 게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이상한 판단을 했다.
나의 어눌한 반대 이론은 선생님의 한마디에 묵사발이 나고 말았다.
“에? 너 그렇게 높은 점수 아니었던 것 같은데….”
눈에 띌 만큼 낮은 점수였던 나를 선생님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나는 그대로 절규에 가까운 떨리는 음성으로 “10점이요…”를 내뱉으며 머리를 책상에 코 박고 엎드렸다. 눈에는 엄청난 양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애들은 깔깔대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도저히 얼굴을 들 수 없던 나는 한참이나 아이들의 놀리는 웃음소리를 듣고 있어야 했다. 그 후 얼마나 지났을까. 온통 비웃고 나를 놀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지더니 고요해졌다.
그때 한 아이의 음성이 나지막이 들렸다.
“그렇게 창피하니?”
나는 고개를 조심스레 들었다. 처음 보는 소년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이고 친구들이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소년에게 말했다.
“왜 나밖에 없어? 애들은? 선생님은?”
소년은 말없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 같은 질문을 했다.
“창피하니?”
나는 흘리던 눈물을 닦고 말했다.
“당연히 창피하지, 내가 너무 멍청한 것 같아. 나는 왜 다른 애들처럼 잘하지 못하는 걸까?”
소년은 말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씨익) 다른 애들처럼, 아니 누구보다 잘하게 해 줄게.”
“뭐라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저기 너는 누구길래..!”
그리고 시야에서 소년이 사라지더니 곧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조용히 하라는 선생님의 야단 소리도 들렸다.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곧 내가 창피를 당했다는 것도 잊어버렸다. 대체 그 소년은 누구였을까?
그날부터였다. 나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학습능력이 발달해 갔다. 전에는 수학 시간에 구구단도 잘 못 외우고 덧셈 뺄샘도 절절 맺던 내가 저절로 암산이 되고 암기력도 월등히 올라갔다. 5학년이 되자 국어, 수학, 도덕, 과학 등 수업시간에 한번 들으면 잊히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수월해졌으며, 당연히 시험도 손쉽게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친구들은 더 이상 나를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그들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이다. 갑자기 공부를 잘하게 된 내가 이상했는지 한때 나랑 꼴찌를 앞다투어 달리던 혁수라는 녀석이 하교하던 나를 붙잡고 말을 걸었다.
“야! 잠깐, 너 대체 어떻게 그렇게 공부를 잘하게 된 거냐? 너 나처럼 공부 진짜 못했잖아. 우리 둘이만 반에서 남녀로 꼴찌였는데, 무슨 비법이라도 있는 거야?”
나는 우물쭈물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런 건 없어! 나도 몰라.”
대충 그 녀석의 대답에 얼버무리고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리고 또다시 그 소년이 생각났다. 그래, 내가 공부를 잘하게 된 거는 순전히 그 애 때문이야. 지금 내 실력은 내 노력으로 얻은 게 아니야. 나는 멍청하고 다른 애들보다 느린데, 이렇게 거짓된 방법으로 얻어낸 결과는 어쩐지 너무 찝찝해. 길을 한참 걸어가는 내내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때 내 앞에 무언가 길목을 가로막는 그림자가 보였다. 그림자를 따라 고개를 올리자 그 소년이 서있었다. 거짓말처럼.
“어! 너는!!”
“안녕!”
“나는 너를 만나고 싶었어! 나에게 대체 무슨 능력을 준거야? 이건 내 능력이 아니잖아.”
“정말 그렇게 생각해? 어째서지? 물론 내가 살짝 도움을 주긴 했지만, 책을 읽고, 단어를 쓰고, 문제를 푼 건 너야. 넌 여전히 넌 네가 멍청하다고 생각하니?”
“음.. 모르겠어. 나는 원래 어렸을 때부터 느린 아이였으니까. 그리고 항상 뒤떨어져 있었으니까. 다른 친구들보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의 너를 돌아봐. 너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어. 적어도 다른 친구들 보다. 나는 그저 너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몰두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을 뿐이야. 만약 네가 아직도 스스로를 멍청하다고 생각한다면 너는 정말 바보야.”
“말도 안 돼. 분명히 전과는 달랐는데.”
“그래, 바로 그거야. 전과는 다를 거라는 희망. 누구보다 잘할 거라는 암시. 너에게 그것이 필요했어. 나는 그것을 주었을 뿐 나머지는 너의 몫이었어.”
“그럼 지금까지 모든 게 나의 능력이었다고?”
소년은 어깨를 으쓱했다.
“너의 노력이었지.”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 말과 함께 또다시 사라졌다.
“스스로 멍청하다고 생각하면 정말 멍청해지는 거야. 똑똑하고 멋진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해 그럼 그렇게 될거야.”
그렇게 소년은 사라졌다. 또다시. 그렇지만 오늘부로 소년의 마지막 말은 암시처럼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그리고 어디선가 나를 쳐다보며 익살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겠지.
나는 웅얼거리며 집으로 걸어갔다.
“나는 멍청하지 않아, 나는 똑똑하고 멋진 사람이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