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와인바를 하나 차렸다. 엄밀히 말하면 아내가 프로젝트를 주도했고 나는 옆에서 슬쩍 거들었을 뿐이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딱히 거든 것도 아니고 쓸데없이 훈수나 두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무언가 일을 진행하려 할 때 가장 도움이 안 되는 부류의 전형이다. 실제로 개업에 필요한 과정 대부분을 아내 혼자서 진행했다. 그러니 이 공간을 같이 ‘만들’었다고 하기에 조금 민망하긴 하다. 가게를 낼 장소를 나도 함께 물색했지만 적당한 공간을 찾아 계약한 이후의 일은 내 손에서 떠나고 말았다.
당시 나는 너무나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었기에 가게 오픈 준비까지 신경 쓰기에는 여력이 없었다. 임대차 계약을 마치고 인테리어 공사가 진행되던 시기는, 하필이면 번역 작업 마감을 코앞에 둔 때이자 회사에서도 중요한 서비스의 배포를 내게 일임해 둔 때였다. 재택근무를 하면서도 ‘월급 루팡’은 꿈도 못 꿨다. 집에서 일을 하면 출근 개념도 없지만 퇴근 개념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회사 일을 마친 후와 주말에는 겨우겨우 번역 진도를 빼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결국 몇몇 잡다한 행정 절차도, 가장 중요한 인테리어 공사 관리도 전부 아내의 몫이었다. 그나마 아내가 인테리어 공사 현장에 발도장 찍는 일을 꽤 즐거워해서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다. 아내는 공간이 구현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신이 나서 인테리어 업자를 도우며 가게를 만들어 나갔다. 나였으면 굳이 나서서 몸 쓰는 일을 하려 하지는 않았을 텐데 볼수록 참 신기한 사람이다.
공사가 모두 끝나고 나서야 처음으로 가게를 찾았다. 무난한 화이트 톤의 벽에 나무로 만든 선반, 작업대, 바 테이블이 8평 남짓 조그마한 공간을 군더더기 없이 채웠고 주광색 조명이 늦여름 밤의 어둠을 따뜻하게 밝혀 주었다. 어렵사리 구한 월넛 색상 제네바 스피커를 선반에 올려놓은 뒤 집에서라면 이웃집 눈치가 보일 만한 볼륨으로 음악을 틀어 보았다. 바로 옆 편의점에서 캔맥주와 군것질거리를 사 와 아내와 함께 기쁨을 누렸다. 옥에 티라 할 만큼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던 천장형 에어컨도 어떻게 보면 UFO가 하늘에 떠 있는 듯 나름대로 색다른 매력을 뽐내는 듯 보였다. 이렇게 애써 ‘정신 승리'하려 해도 엉뚱하게 벽을 뚫고 나간 에어컨 배관은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했지만. 어쨌든 이날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정말 우리만의 공간이 생기긴 생겼구나, 우리 인생에 새로운 장이 시작되는구나 싶었다.
와인바를 오픈하면서 소위 ‘갓생’ 살이가 시작됐다. 월화수목금 주 40시간을 개발자로 일하고, 평일 퇴근 후와 주말 하루는 조그마한 와인바의 한 구석을 지키는 삶. 종종 투잡을 해 왔기에 갓생 살이가 재개되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앞서 언급했듯 가게를 오픈하기 직전까지도 직장 생활과 번역 일을 병행하고 있었다. 어차피 언제부턴가 퇴근 후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내게는 익숙해졌고 그만큼 이 생활이 특별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에디터 박찬용이 뉴질랜드의 한 돌고래 투어 가이드에게 들었다는 말을 빌려보겠다. “나는 배를 너무 오래 타서 땅에 있으면 멀미가 나요.”
자영업을 본업과 병행하는 ‘허슬러’들은 예나 지금이나 존재해 왔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나보다 훨씬 부지런하게 산다. “낮에는 직장인으로 살다가 퇴근하면 술집에서 새벽 2시까지 일했다"라고 하는 음주문화공간 기획자 원부연의 이야기, 회사를 다니는 사장이 무려 연중무휴로 운영했다는 망원동의 어느 칵테일바 이야기를 들으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매일매일 영업 준비는 물론이고 오픈 후 주방 업무와 서빙까지 대부분을 사장인 아내가 도맡아 하기 때문에 비교 자체가 실례다.
그래도 가게에서 보내는 시간이 생긴 만큼 여가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여전히 읽고 싶은 책, 보고 싶은 시리즈와 영화는 수두룩하고 틈틈이 운동도 하고 외국어 공부도 하고 싶은데 모든 걸 해내기에는 시간 관리가 너무 어렵다. 그렇다고 수면 시간을 양보하기는 싫으니 가능한 대로 짬을 내야 한다. 어찌어찌 지하철에서 아이패드로 책을 읽거나 외국어 공부를 하고, 비교적 출근 시간이 자유롭다는 점을 활용해 아침 운동을 할 때도 있다. 출퇴근길 지하철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 데에는 많이 익숙해졌으나 잠 대신 아침 운동을 택하는 건 여전히 쉽지 않다.
이런 글을 쓰는 건 내가 여가를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회사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단결근은 절대 안 되고, 가게 역시 아내가 임시 휴무를 선언하지 않는 이상 내가 같이 가서 자리를 채워야 한다. 그러나 내 글쓰기에는 강제성이 전혀 없다. 퇴근길이 곧 출근길인 삶을 몇 달 동안 지속 중인 사람으로서, 생각 없이 누워 쉬어도 될 시간에 글을 쓴다는 건 그만큼 절실하게 무언가를 쓰고 싶다는 뜻이다.
아내가 와인바를 차리겠다 선언하고, 정말로 우리의 공간이 현실화되어갈 때쯤 어떻게든 내 이야기를 기록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도대체 무슨 글을 쓰려는 거냐 묻는다면 와인바에서 일을 하며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담겠노라고 대답하겠다. ’근데 이제 직장 생활을 곁들인’ 이야기, 특히 개발자를 본업으로 하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싶다. 두 가지 일은 어딘가 닮은 점도 있고 전혀 다른 점도 있다. 그 사이에서 즐거워하면서도 혼란스러워하며 내적으로 역동적인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가게가 오픈한 뒤로 결근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이니 내 낮과 밤의 두 얼굴을 풀어낼 자격은 충분하지 않나 싶다.
아쉽게도 와인바를 차리는 과정에서의 ‘꿀팁’ 같은 건 제공해 주지 못할 것 같다. 가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와인바를 운영할 때 유용한 노하우 역시 딱히 언급할 것 같지 않다. 내게 그런 노하우가 있었다면 일단 우리 가게부터 대박을 냈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보를 제공하는 글은 회사에서 벌써 차고 넘치게 쓰고 있다. 나는 객관적인 정보보다 주관적인 감정을 전달하고 싶다. 혹시라도 자영업을 꿈꾸며 무언가 정보를 얻어 가고자 하는 독자가 있다면 미리 사과의 말을 전한다.
직장과 자영업을 병행하는 삶이 분명 평범해 보이진 않을 테니 내 이야기를 글로 쓰면 누군가는 재밌어하리라 믿는다. 과연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나름대로 실험을 해 보는 것이기도 하다. 아내는 내 글에 관심을 가져 줄 사람은 별로 없을 거라고 냉정하게 진단했다. 그럼에도 난 그저 누군가가 적당히 좋아하고 적당히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글을 남겨 보고 싶다. 내 글을 읽고 서울 어딘가에 이렇게 사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준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다.
겸손하고 초연한 척했지만 머릿속에는 이미 ‘망상 노트’가 조금 작성되어 있다. 가게 손님들이 내 글을 읽고서 재밌게 잘 읽었다며 응원을 보내고, 브런치에서도 조회수와 구독자가 제법 늘고, 몇 편의 글을 엮어 책을 내기도 하는…. 글쓰기가 여가를 넘어 또 하나의 ‘잡’이 될 수도 있을까. 얼마든지 망상을 더 전개할 수 있겠지만 이곳에 더 쓰기는 낯 뜨겁다. 나라고 세상 하루 이틀 살아 본 것도 아니고 사람 일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사실 정도는 잘 알고 있다. 애초에 이 와인바도 남몰래 그려 보던 이상향에서 꽤나 멀어진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글을 맛깔나게 잘 쓰는 것도 아니니 일단 기대치를 낮춘 채로 시작하려 한다. 자, 시작은 했으니 손 가는 대로 계속 써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