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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라이클리너 Oct 25. 2022

이름: 없음

개발자가 가장 어려워하는 일이 무엇일까? 필요한 기능을 코드로 구현하는 것? 개발자는 물론이고 기획자, 디자이너 등 다양한 직군의 동료와 소통하며 협업하는 것? 개발을 마치고 가이드 문서를 만드는 것? 모두 쉽지 않은 일인 건 사실이다. 그런데 실제로 테크 커뮤니티에서 개발자를 대상으로 설문을 했더니 절반 정도의 득표율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한 일이 따로 있었다. 바로 ‘이름 짓기’다.


코드란 본질적으로 혼자만의 작업물이 아니다. 함께 개발하는 동료들이 파악하기 쉽게 코드를 짜는 것이 개발자에게는 중요한 미덕이며 그 출발점이 이름 짓기다. 그러니 새로운 파일을 만들 때 혹은 새로운 변수나 함수를 만들 때면 어김없이 이름을 어떻게 지을지 고뇌에 빠지게 된다. 글을 쓸 때에도 제목을 어떻게 할지, 이 자리에 어떤 단어를 쓰고 저 자리엔 어떤 단어를 쓸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고 처음에 잘 고민해서 좋은 이름을 지어 놓아야 자기 자신에게도 이롭다. 내가 짠 코드여도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보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이름만 잘 지어 두어도 이런 고생을 크게 줄일 수 있다.


개발자가 좋은 이름을 짓기 위해 따라야 할 원칙은 간단하다. 첫째, 시각적으로 읽기 쉽도록 대소문자와 특수 기호를 잘 섞어서 사용하고 이름의 길이를 너무 길거나 짧지 않게 지으면 좋다. 둘째, 이름만으로도 변수나 함수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 특징에 따라 접두사나 접미사를 더하는 등 소스 코드 내에서 검색하기 편하도록 짓는 센스도 필요하다. 물론 오탈자를 최소화하는 건 기본이다.



이렇게 쭉 정리하고 보니 개발자의 이름 짓기 원칙은 메뉴 이름을 정할 때 도움이 될 것 같다. 길이가 적당하면서 이름만 봐도 대충 어떤 요리인지 그려지는,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떠올리기 쉽고 검색하기 쉬운 이름. 내 생각에 아내가 고안한 메뉴 이름들, 예컨대 ‘직접 구운 빵 한 접시’나 ‘올리브 젤라또 & 바삭한 사워도우’, ‘삼색 감자구이’ 등 모두가 이런 원칙을 잘 따르고 있다. 원칙을 정해 두고 나온 결과라기보다는 원체 명확함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자연스레 나온 이름일 테다. 나도 개발자로 몇 년 일하다 보니 좋은 이름을 짓는 데 강박 비슷한 게 생겼는데 그런 나도 메뉴판을 볼 때마다 퍽 만족스럽다. 물론 ‘모르타델라’라든지 ‘부라타 치즈’처럼 어렵게 느낄 만한 용어도 있다. 나 역시 가게를 열기 전에는 뭔지 잘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고유한 재료 명칭을 더 풀어서 쓴다면 오히려 손님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듯하다.


그럼 개발자의 이름 짓기 원칙이 와인바 이름을 지을 때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어떤 이름이든 눈으로 입으로 읽기 쉽고 길이가 적당하면 나쁠 것 없을 테니 첫 번째는 동일하게 적용 가능하겠다. 세 번째 원칙을 소스 코드가 아닌 웹 검색으로 바꿔서 고려한다면, 이미 다른 뜻으로 두루 사용되고 있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예를 들어 보자.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눈앞에 스피커가 보인다. 만약 와인바에 ‘스피커’ 같은 이름을 붙였다가는 여지없이 검색 엔진의 심판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와인바에서 사용하기 좋은 스피커 광고나, 와인바에 갔더니 스피커가 좋아서 음악을 잘 들었다는 후기 따위가 줄줄이 나올 테다. 아마 커피 브랜드 ‘프릳츠’가 모범 사례가 아닐까 싶다. 별 뜻 없이 어디에도 없는 고유한 이름을 떠올렸다고 하니 말이다. 


앞의 두 경우에 비해 두 번째 원칙은 크게 의미가 없어 보인다. 세상 모든 와인바에 대놓고 ‘와인’이나 ‘비노vino’, ‘빈vin(또는 뱅)’이라는 말을 붙인다고 생각해 보면 그것대로 우스운 일이다. 와인바인지 티가 안 나더라도 가게의 정체성을 비롯해 업주의 각오나 철학을 담을 수 있는 이름이라면 별 문제없을 듯하다.



나와 아내도 이 정도의 조건을 고려하여 가게 이름을 지으려고 했다. 그렇다고 원칙을 무조건 고수하기보다는 최대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유연하게 브레인스토밍을 해 봤다. ‘가게 이름 브레인스토밍’이라고 이름 붙인 노션 페이지에 고뇌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것저것 떠올리다 보니 몇 가지 큰 범주로 분류가 가능해졌다. 짧지만 왠지 임팩트 있어 보이는 감탄사, 주력 메뉴인 빵과 관련된 단어, 술이나 음주와 연관되지만 ‘비노’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은 단어, 프로그래밍 용어 등등. 각 범주 아래에는 구체적인 이름들을 적어 두었다. 지금 다시 펼쳐 보니 ‘왜 이런 걸 떠올렸지?’ 싶은 이름들도 많아 민망하다(브레인스토밍에서 가장 부적절한 태도입니다).


떠올리는 이름마다 영 시원찮다는 생각이 들 무렵 우리 가게만의 정체성을 다시 정리해 봤다. 와인을 격식 없이 즐기자는 바람으로 다리가 없는 잔을 준비했다. 외벽에 간판도, 길가에 내놓을 입간판도 없다. 우리 가게의 두 중심축인 내추럴 와인과 사워도우 모두 상업 효모를 쓰지 않거나 최소화하여 만들어진다. 항상 꿈꿔왔던 스탠딩 바가 실현된다면 의자도 없어질 것이다. 우리 가게에는 없는 게, 또는 없애고 싶은 게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한글로 쓰면 ‘없음’, 로마자로 쓰면 ‘upsm’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와인바 차리는 이야기에서 이름의 유래를 구구절절 읊다니 이보다 더한 클리셰가 있을까. 그럼에도 이렇게 짚고 넘어가는 건 그동안 여러 손님들이 가게 이름의 뜻을 궁금해했기 때문이다. 진부했더라도 부디 용서해 주기 바란다.


가게 이름이 이렇게 지어진 바람에 아내는 개업 전 행정 절차를 거칠 때마다 상대 공무원을 당황시키곤 했다. 와인 수입사에 연락을 하면서 업장 이름을 이야기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당연히 진지했으나 상대방 입장에서는 장난처럼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학창 시절 어른들에게 공개하기 힘든 별명이 기가 막히게 웃긴 것처럼, 우리 가게의 이름은 주변 친구들과 손님들에게 즐거움을 안겨 주고 있다. 


더구나 ‘없음’이 ‘음’으로 끝나고 ‘upsm’이 ‘m’으로 끝나는 덕분에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월간 없음악monthly upsmusic’이라는 콘텐츠 이름이 탄생했다. 이쯤 되면 눈치챌 수밖에 없겠지만, ‘없무 일지upmu log’라는 이름 역시 비슷하게 ‘없’과 ‘up’을 이용해 너무나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여러모로 잘 지은 이름임에는 틀림’없’다.



개발자가 짓는 변수나 함수 이름은 쉽게 고칠 수 있다. 마우스 휠 몇 번 스르륵 움직이고 클릭 좀 한 다음에 키보드 몇 번 두드리면 되는 일이다. 개발 툴이 좋아져서 소스 코드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이름을 한 번에 바꾸기도 쉽다. 반면 아무리 절차가 간소화되었다 한들 상호명 변경에는 품이 꽤 들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구글에 슬쩍 검색해 보니 요즘은 홈택스 웹사이트를 이용해서 온라인으로도 상호명을 바꾸는 모양이다. “세상 많이 좋아졌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세상이다. 


이러나저러나 우리 가게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폐업하기 전까지는 이름이 바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물론 ‘여기 와인 맛없음’, ‘여기 사장 개념 없음’ 같은 리뷰가 눈에 보인다면 ‘상호명 변경 방법’을 다시 구글링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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