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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E Aug 22. 2024

성실하게 살면 손해인가요?

'매사 성실하다''근면하다''착한 성품을 지녔다'라는 말들은 어쩌면 어린아이가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처음 듣는 주관적 평가였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학기마다 나눠줬던 통지표 맨 아래에는 작은 직사각형 공란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엔 한 학기 동안 담임 선생님이 관찰한 나에 대한 짧고 강렬한 주관적 평가(혹은 감상이라고 해야 하나)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고작 몇 문장 쓰지도 못할 작은 네모칸에 담긴 어른의 손글씨는 어떤 위엄과 묵직한 신뢰감 같은 걸 전달했다.


나는 통지표를 볼 때마다 그 부분이 꽤 흥미로웠는데, 매일 얼굴 보는 사이의 담임 선생님이 차마 내 앞에서는 하지 못하는 나의 대한 속마음을 부모님에게 몰래 전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짧고 성의 없어 보이는 문장들도 있었지만, 볼 때마다 '평소 나를 이렇게 봤구나' 혹은 '내가 그런 아이라고? 말도 안 돼.' 뭐 그러다가 '맞아, 난 그런 아이야. 그러니까 더욱더 성실한 아이가 되어서 실망시키지 말아야지'라는 등의 오만가지 생각이 맴돌았던 것 같다.


지금 같았으면 저 애매모호한 말들이 칭찬인 지 아니면 선생님이 40명 가까이 되는 반 아이들의 통지표에 부모도 아이도 그러려니 넘어갈 적당하고 안정적인 문장들을 고른 건지, 그것도 귀찮아 AI의 답습인 지 의심이라도 했겠지만(그나저나 요즘도 선생님들이 저렇게 써주나요?). 어쨌든 요즘의 MBTI처럼, 그 시절 대부분 어린이들의 유형은 성실하거나 근면하거나 혹은 주의가 산만하거나 등으로 나뉘던 것 같다. 학교는 사회생활을 통해 남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첫 번째 시험대였고, 그 작은 네모 칸에 적힌 문장들은 평생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규정하는 척도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성실한 것이 요즘 사회에서도 좋은 의미일까? 왜 성실해야 하지? 성실과 근면은 다른 것인가? 성실하지 않는 것은 도덕성과도 맞닿아 있는 것일까? 왜 성실하거나 근면하지 못한 사람은 비난을 받지? 이제는 스스로 '나는 근면, 성실한 사람입니다'라는 문장 하나를 쓰자니 수많은 물음표 살인마들이 괴롭힌다.


그런데 성실한 것이 요성실의 사전적 의미는 '정성스럽고 참됨'이다. 근면의 사전적 의미는 '부지런히 일하며 힘씀'이라고 되어 있다. 한자로 풀이하면 '마음을 쏟아서 애쓴다'라고도 한다. 근면의 반대말은 나태. 우리는 영화에서 익히 보여줬듯 근면하지 않으면 '나태지옥'에 가게 되어 죽어서나마 자기 몫의 근면 할당량을 채워야 한다. 다시 생각해 보니, 어른들은 아이들의 어떤 모습에서 '저 아이가 정성스럽고 참되며, 마음을 쏟아서 애쓰며 사는구나'로 평가할까? 통지표 속 문장은 보면 볼수록 기이하다.


예전에 모 기업의 인사담당자에게 들은 얘기지만, 기업이 좋은 대학에 나온 사람을 선호하는 이유는 좋은 대학교에 갔다는 것을 성실함의 기준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학생 때 마땅히 해야 할 일에서 최선을 다한 결과라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절대적 평가 기준은 아니었고, 사적인 견해의 기준이 될 수는 있으리라.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들이 오히려 회사를 더 빨리 그만둬서 문제라지만.  


정성스럽고 마음을 쏟아서 애를 쓰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결국 성실과 근면하게 살기 위해서는 꾸준함과 인내라는 동력이 투입되어야 한다. 사회적, 경제적 성공을 거둔 모 유명 가수가 "이제는 허튼 마음을 먹을 에너지와 시간이 없어요. 참되고 올바르게 사는 것에 하루 가장 많은 에너지가 쓰고 있어요."라는 인터뷰를 보고, 나는 어릴 적 통지표에 적힌 클리셰 같은 문장들이 떠올랐고, 성실함과 근면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돌이켜보니 지금껏 내가 집착했던 성실과 근면에는 적절한 보상과 희망이 뒤따랐다(그래야만 했다).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가고, 근면해서 일하면 승진과 성공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목표에 집착하는 애씀은 때때로 나를 지치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성실과 근면으로 채찍질하는 삶은 조금이라도 나태한 하루를 보내고 나면 고문처럼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만들었으니까.


참되고 올바르게 살기 위해 나태의 유혹을 뿌리치고, 하기 싫은 일을 해내고 (아무런 보상이 없다 할지라도) 그런 하루하루를 인내하는 것은 결국 꾸준함의 승리다. 꾸준함이 없으면 결국 성실도 근면도 무용하게 된다. 이제는 통지표 같은 걸 받을 일 없는 나이라 더 이상 성실하게 살기 위해 힘쓴다고 칭찬해 주는 일은 없지만, 여전히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꾸준함이라는 감옥에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고 묵묵히 살아간다.


누군가는 요즘처럼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는 목표를 향한 지름길을 빠르게 찾아가는 것이 인생의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 측면에서 효율적이지 않냐고 하겠지만, 자신의 위치에 놓인 쳇바퀴에 올라 성실히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게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보이지 않는 근면의 힘들이 모여 우리 사회를 지탱해주고 있는 것이라 나는 오래오래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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