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잘 알고 있다는 착각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는 거의 모두가 같은 질문을 한다. 나는 잘하고 있을까? 나는 누군가에게 자부심을 선사하고 있을까? 나는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일까? 나는 일을 잘할까? 마음이 넓고 배려심이 있을까? 괜찮은 녀석일까? 나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지금까지 좋은 부모였을까?
나는 좋은 사람일까?
소설 <불안한 사람들>에 등장하는 문장 중 일부다. 보통 책을 읽다가 마음을 관통하는 문장을 발견하면 별도로 표시(책 귀퉁이를 접어놓는다거나 포스트잇을 붙여놓는 등, 책에 밑줄을 긋는 것이 나에게는 금기 같은 것이라) 해뒀다가 개인적으로 쓰는 노션에 <문장 수집>이라는 폴더를 만들어 놓고 옮겨 적는다. 이 문장도 거기에서 다시 건져낸 것이다. 그다음 문장에는 이런 것이 붙여 쓰여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진면모를 알고 싶다고 말하지만 진심으로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때론 어떤 문장들은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마음을 쿡쿡 쑤신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도 소설 속 주인공들과 같은 질문을 하고 있나 보다. 홍수처럼 쏟아붓는 자문에 답을 구하지 못하는(안 하는) 것 또한 소설 속 주인공들과 똑 닮았다.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인식한다는 것을 조금 격식 있게 이야기하면, '자기 객관화'라고 할 것이고, 자기 객관화에 미숙한 사람이 흔하게 하는 자기 방어법을 속된 말로 '내로남불'이라 부른다. 가만 보니 요즘 시대에 자신을 객관화한다는 것은 꽤 비범한 능력 같기도 하다. 종종 책 속에서나 TV에서는 자기 객관화의 좋은 예들이 나타나는데, 대체로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깨닫고 받아들일 줄 알며,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고, 널뛰는 감정을 스스로 잘 다스리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한 이들이다. 자기에게 엄격한 듯 보이지만, 사실 자신 스스로와 가장 친한 사람들인 셈이다. 하지만 매일같이 업데이트되는 사진과 영상들로 하루에도 수백 번씩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겐 자기 객관화가 익숙하지 않다. 인스타그램 속 사람들이 먹고, 쓰고, 노는 찰나의 순간이 내 삶의 행복 척도를 만드는 판국에, 나의 진면모를 들여다보는 것보다 나의 진면모를 '좀 더 있어 보이게' 만드는 것이 더 '있어 보이는 나' 같지 않는가?
누구나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하는 질문들(맨 위 문장 참고)에 우리는 과연 확신을 구할 수 있을까? 세상과 작별을 고하는 그 순간,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그 순간 머리에 전구가 켜지 듯, '아,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라고 스스로를 명쾌하게 정의할 수 있으려나. 인간의 모든 말과 행동에는 타고난 천성이과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길러진 본성이 깃들여져 있다고 <삼식이 삼촌>이 그랬다. 최근 애니메이션이라고 얕봤다가 얼토당토 안 한 곳에서 눈가가 시큰해져 부끄러웠던 영화 <인사이드 아웃 2>에서도 비슷한 시퀀스가 있다. 한 인간을 지켜내는 신념과 외부 자극으로 인해 휘몰아치는 감정의 격돌이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의 진면모를 모른다고 하지만, 우리가 매일같이 하는 모든 행위와 말, 감정 속에서 자신의 진면모를 드러나기 마련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정작 자신은 진짜 자신을 모르거나 혹은 외면하거나. 둘 중 하나다. 진면목이라는 단어가 조금 아리송하다면, 사전의 뜻대로 '본디 지니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얘기해 보자. 결국 스스로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우리는 인정하지 않거나 그러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스스로를 극단적으로 과대평가하거나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거나 남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진면목을 수치화한다거나 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어떤 이유로든 우리는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대체 왜 그럴까?
"자기가 누구인지 잘못 알고 있다가 그 착각이 깨지는 것. 그게 성장이라던데?" <작별인사>-김영하
신체적인 성장은 누구나에게 찾아오지만, 마음의 성장은 노력하지 않으면 이뤄지지 않는다. 올해부터 국가 프로젝트를 하나 맡아 거의 매달 전쟁에 참전한 어르신들을 인터뷰 영상 촬영을 진행하고 있는데,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말과 말 사이의 깊은 행간에서 알 수 없는 뭉클함을 느낀다.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 보다 많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과거를 회상한다는 감정이 지금 내가 지난 30년을 돌아보는 것과는 다른 것일까. '그땐 철이 없었어요..' 어느 어르신이 여음구처럼 계속 읊조릴 때는, 굳이 '뭐가요?'라고 물어보지도 못했다. 그만이 알 수 있는 삶의 행간에 내가 감히 끼어드는 것 같아서.
결국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의 진면목을 반드시 똑바로 바라보는 시기가 온다. 성장의 아픔이 온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투쟁과도 같기 때문에 조금은 따끔할 지도 혹은 열병처럼 앓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를 깊숙하게 들여다보는 경험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라는 존재를 가장 빛나게 해 줄 무기가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30대를 6개월 남긴 지금, 지난 10년 간 내 마음의 요동은 나의 진면목을 너그럽게 인정하기 위한 투쟁이었던 것 같다. 물론 그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순물 같은 감정들을 쌓아두지 않고 스스로 걸러내고 거름망을 치면서 나의 진면목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한다. 물론 쉽지 않다. 여전히 '나는 잘하고 있는 것인 지' '나는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인 지' '나는 좋은 사람인 지' 매일 '불안'이 감정 컨트롤러를 마비시키며 나를 혼동에 빠뜨린다. 영화처럼 힘겹게 기쁨이 찾아오지 않더라도 불안과 함께 나는 앞으로의 40대를 쭉 함께할 것이라는 것도 대강 안다. 어쩌겠는가. 그게 내 진면목인 것을. 자기 객관화가 힘든 세상 속에서 나는 비범하지 못한 멘털 소유자라는 것을 정확히 깨달았다는 것만으로도 자기 객관화에 어느 정도 성공한 건 아닐까?
*위 글은 자기 서사 프로젝트 <디깅디깅딥>의 주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디깅디깅딥>은 한 번쯤 스스로에게 솔직하게 자신을 들여다보는 셀프인터뷰로, 프라이빗한 영상 기록을 남겨드립니다. 당신이 외면해 온 당신만의 진면목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싶나요? 자세한 내용은 https://www.newwaves.co.kr/selfstudio 에서 확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