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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E Mar 06. 2024

회사가 싫어서, 회사를 만들었어요.

일은 좋은데, 회사 생활이 싫을 때 

한 번의 휴학 없이 대학을 스트레이트로 졸업하고, 잡지사 어시스턴트 아르바이트로 시작해 스물다섯, 언론사에서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부터 작년까지 쭉. 돌이켜보니 나는 여러 회사를 옮겨다니긴 했지만, 정작 일이 싫어서 그만둔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사회 초년생 때는 (마치 의식처럼) 마감이 끝나면 매번 술을 퍼 마시며 세상 가장 불행한 직장인의 코스프레를 하며 인생 한탄을 토해내기도 했지만, 실상 그건 일을 더 잘하고 싶어서 야단이었지, 일을 하기 싫어서 부린 응석은 아니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늘 내가 하는 일이 좋았고, 즐거웠다. 다만, 이토록 즐거운 일을 어떻게 해야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과 깊은 혜안이 없었을 뿐. 그저 매달 나에게 주어진 일들을 빈틈없이 해내는 것, 잘하든 못하든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채워야 할 할당을 구멍 없이 메우는 것만으로도 회사에서는 일 잘하는 막내라고 칭찬을 받을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나는 또 그걸 곧이곧대로 믿었다. 나는 정말로 내가 일을 잘하는 줄 착각했다. 


연차가 쌓이면서, 일을 잘한다는 것이 선후배(특히 선배)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기가 맡은 일을 해내며(혹은 남이 맡은 일도 기꺼이 떠맡아 해내며), 팀워크에 적당한 친밀감을 유지하며, 뭐 전반적으로 튀지 않게 (그만두지 않고 오래 시켜먹을 수 있도록) 다니면 되는 것이라 삐딱하게 생각한 적도 있다. 높이 올라갈수록 피라미드 맨 아래에 발버둥 칠 때는 보이지 않았던 시야가 날카로워졌다.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회생활의 정치적 싸움과 이해관계가 때론 진짜 '일'을 잘하는 것보다 회사 생활에 더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제 '일'은 즐겁고 재미있어서 한다고 주변에 이야기를 하면, 다들 '너네 집 부자구나'라고 하거나 '어디서 순진한 척이야'라고 조롱을 받기 딱 좋다는 것도 안다. (일이 재미있으면 '네가 다 해!')


'여전히 나는 내가 하는 일이 너무 즐겁고 좋다.' 라고 말하면, 당신도 속으로 내가 예상하는 반응을 하고 있으려나? 그런데, 나는 진심으로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일이 무척 즐겁고, 내 삶에 단단한 자긍심을 불어넣어 주며, 이 일을 평생 못하는 것이 더 괴롭고 힘들 만큼 오랫동안 애정을 갖고 일 하고 싶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에게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드는 작업은 나만의 고유성, 나를 증명하며 끊임없이 나아가게 하는 또 다른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콘텐츠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포지셔닝 외의 회사에서 내려주는 높은 직책이나 월급도 큰 의미 없이 다가왔던 것도 사실이다. 회사라는 것이 승진과 월급 빼면 뭐 있겠냐고 흔히들 말하지만, 내가 회사를 오랫동안 다니며 일하고 싶은 동기가 되진 못했다는 거다.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직서를 내고 도망쳐 나온 회사들로 인해 스스로 책임감에 대한 부채감을 갖은 적도 있지만, 아무런 목적과 동기 특히 '일하는 재미' 없이 회사를 다닌다는 것이 나에게는 그 어떤 일보다 더 어렵고 힘겨웠다.  


사업을 시작하고 1년이 지난 지금, 가장 좋은 점은 내가 일할 수 있는 만큼 마음껏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내의 정치싸움이나 이해관계, 책임의 불분명함 등에 신경을 끄고, 모든 결정을 스스로 하고 온전히 책임지는 아주 심플한(그리고 책임감이 막중한) 구조 덕분이다. 그동안 회사라는 큰 울타리 안에서 나는 일에 대한 열정과 성실이라는 갑옷을 입고 회사에서 주어지는 모든 일을 쳐냈다. 어쩌면 나는 '일을 잘한다'라는 칭찬으로 길러진 수동태적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의 세포 속에 주입된 첫 회사 생활은 그저 주어지는 것을 잘하면(혹은 주어지는 것보다 조금만 더 해도) 평균이 되었으니까. 안타깝게도 나는 마치 뒤늦게 스스로가 진짜 인간이 아닌, 인간처럼 만들어진 기계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혹은 로봇)처럼 자아를 찾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괴롭히던 일과 회사 생활의 괴리에서 벗어나 '오랫동안 나의 일을 하기 위해' 회사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더 이상 회사에 나를 맞추지 않고, 나에게 맞는 일의 시스템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나와 일 그리고 회사를 동기화시키자, 자연스럽게 수동태가 아닌 능동태의 인간으로 사고가 변해갔다. 주어지지 않아도 능동적으로 일을 만들고, 수동적인 것을 거부하며, 내가 주어가 되어 상대방의 행위를 부추긴다. 마치 우주의 섭리처럼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다.  


'선택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요.' 어떤 배우의 고민에 동질감을 느낀 건, 나 또한 늘 누군가의 선택을 받아왔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좋은 회사, 좋은 직책, 더 높은 연봉. 내가 아닌 상대방의 가치로 나를 증명해야 하는 일은 회사의 소속되거나 회사를 운영하거나 달라지는 건 없다. 다만, 그것에 대한 불안의 종류는 조금 다르다. 내가 주도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선택과 책임의 무게가 확연히 다르고, 그것을 타개해 나가는 사고의 회로와 추진력의 지속성에 있어 전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회사의 소속되어 있건 아니건 결국 '일을 잘한다는 것'은 그리고 '일을 즐겁게 오랫동안 한다는 것'은 모두가 자신만의 고유성을 드러내고 스스로 인정받고 싶은 것이 아닐까? 내 회사를 만든다는 것은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가 아니라, 혹여 실패할지라도 한 번쯤은 누군가 탄탄하게 지어 놓은 울타리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의 울타리를 하나씩 지어나가 보는 것으로도 인생의 충만한 경험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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