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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경종이었다. (1)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 Ten of Wands

by 나임



꽤 오랜 시간 책들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반짝 빛나는 한 권이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였다. 무작위로 뒤섞인 카드들 중 무의식이 건네는 한 장을 뽑아내는 것처럼 책장에 꽂힌 그 책을 꺼냈다.


소설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전쟁 이야기는 더더욱 관심 밖이라 읽어볼 생각조차 없던 작품이었다. 이름만 익히 들어 알았을 뿐 어떤 내용인지 들여다보고 싶은 욕구는 들지 않았던 책이 지금에서야 만나고 싶어진 이유가 무엇일까, 헤밍웨이는 엄마가 된 나에게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타로 카드를 한 장씩 뒤집는 상담가를 기대와 걱정,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는 내담자가 되어 책을 펼쳤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내 삶이고,
내 삶의 연수는 칠십 년이 아니라 사십팔 시간,
아니 고작 육십 시간이나 열 시간이나
열두 시간일지도 몰라.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1, 320p



소설 속 주인공은 '로버트 조던'이다. 미국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교수였지만 파시스트에 대항하고자 공화파 자원병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여한다. 다리 폭파 임무를 맡게 된 그는 함께 일을 수행할 게릴라 부대와 사흘 밤을 보내게 되는데, 그곳에서 손금 보는 집시를 통해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는 동시에 마리아라는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죽음 앞에서야 만난 운명 같은 사랑. 그는 마리아와 보내는 이 사흘이 곧 자신의 삶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이보다 더 가혹한 삶이 어디 있을까. 전쟁의 잔혹함 만큼이나 잔인한 운명이다.



지금 내가 그 전쟁통에서
사랑 중이다



실제 전쟁에 비할 순 없지만, 육아도 전쟁에 곧잘 비유되곤 한다. 지금 내 삶이 바로 그 전쟁통 같기만 하다. 둘째를 낳고 100일도 안 돼서 남편은 2조 2교대라는 그야말로 지옥 같은 근무에 들어갔다. 심지어 하루 12시간을 일한다. 덕분에 난 24시간 비상근무 체제에 돌입했다. 기한이 없는 채로.


미운 네 살과 갓난아기, 그리고 집에선 쉬어야만 하는 남편.


나는 늘 전시상황이다. 갓난아기 땐 새벽 수유를 해야 해서, 새벽 수유를 끝내니 이앓이 때문에 둘째는 돌이 다 되도록 새벽에 내리 자는 일이 없다. 청각이 예민해서 작은 소리에도 잘 깨는 탓에, 아이가 낮잠을 자는 동안에도 긴장 상태다. 첫째는 동생 따라 아기처럼 행동한다. 스스로 잘하던 일들,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들을 엄마한테 해달라고 징징거리기 일쑤다. 주말도 없이 일하는 남편은 육아는커녕 자신의 끼니조차 챙길 여유가 없다.


세 남자를 등에 업고 사는 듯한 나날들이 쌓일수록, 마음에서 퀴퀴한 냄새가 났다. 털어내지 못한 먼지들은 어느새 마음을 틀어막았고, 어느 날 이 폭약은 터져버렸다.


운명처럼 만난 우리들인데,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준 내 사랑들인데,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났지만 나는 서서히 죽어가는 것만 같았다. 마치 로버트 조던의 잔인한 운명처럼 말이다.



스스로 짊어진 짐,
버겁지만 기어코 끌고 가려는 자



Ten of Wands



조던은 미국인이면서 신념 하나로 스페인 내전에 자원해 목숨을 건 투쟁을 한다. 시한부 길을 선택해 걷는 여정에서, 영원을 꿈꾸게 하는 사랑을 만난다. 그는 스스로 이 삶을 짊어진 셈이다.


나도 스스로 선택한 배우자와 가정을 꾸렸다. 그리고 목숨보다 중요한 두 아이를 낳아 나를 내어주며 살고 있다. 이도 조던처럼 스스로 짊어진 삶이다.


조던은 이 무거운 삶을 무서울 만큼 완벽하게 지고 갔다.



*3화에서 이어갑니다.







(10년 전쯤 타로를 잠깐 배웠다. 아주 얕고 어설픈 타로 지식으로 남편과 가끔 집에서 셀프 타로를 보곤 했다. 오랫동안 서랍장에 묵혀놓았던 카드를 오랜만에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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