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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원 May 21. 2022

늦게 타는 바람

청개구리 병은 반사적인 저항일까?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반항일까?

어려서부터 하라는 건 왜 그리도 하기 싫었는지 모르겠다. 나도 그랬고 같이 사는 사람도 그랬고 딸아이도, 아들도 다 그렇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나만 앓고 있는 불치병이 아니라는 점이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증상은 그랬다. 

모처럼 맘먹고 방을 치우려는 찰나에 엄마의 한마디와 부딪히면 그날의 방 정리는 실패였고  

알량한 효도랍시고 설거지라도 하려면 꼭 그 시점에 누군가가 거들먹거렸다.

“오늘은 네가 설거지 좀 하지?”

‘모처럼’이란 생각은 단전에서부터 ‘싫음’으로 전향되어 꼬라지를 부리게 했다.  

우습게도 놀부의 심보는 언제, 어디서든 감초처럼 튀어나왔다.   

   

그 어쭙잖은 반항 중 하나가 흥행에 성공한 영화나 베스트 드라마에 대한 거부다. 

어쩌다 봤던 영화가 흥행하면 그런가 보다 했지만, 보지 않은 영화를 누군가가 강추하면 거부감이 생기면서 관심이 멀어졌다. 스포 되는 이야기에서 재미가 삭감되고 감정이 어그러져 작품에 대한 열기가 대충 마무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의 해방 일지』가 그렇다. 

밝은 조명과 공간이 산만한 거실에서 접한 첫 방송은 느리고 지루했다. 기대했던 ‘구 씨’는 대사가 없었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고집스러운 모습이 담긴 가정사는 답답했다. 산포에서 서울까지 출퇴근하는 모습이 반복되자 더 애쓰지 않고 해방의 문을 닫았다. 

그 후로 몇 회가 더 방영됐는지 모르겠지만 주변에서 입김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봤니? 재미있지? ‘나의 아저씨’만큼 좋더라. 그거 꼭 봐라.”     

난 동참하지 않았고, 동감하지 못했다. 

대열에 끼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도 않았고 내용도 궁금하지 않았다. 

도리어 내 지루함을 어필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얼마간 해방에서 벗어나 있던 난 며칠 전 한 문장에 걸려들었다.       

「손석구! 너 누구니」

불 꺼진 침대에 누워 휴대폰의 스크롤바를 내리는데 볼드체로 쓰인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구 씨’가 다시 궁금해졌다. 그리고 내가 느꼈던 지루함으로 잠을 잘 수도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해방을 위한 동호회.

인생에서 만나는 수많은 훼방.

‘하루를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증에 있는 사람’

‘어디 하루뿐일까. 한 달을 잘 살고 싶고 죽을 때도 잘 죽고 싶은 게 현실인데’

어느새 드라마 속 대사와 대화하고 있었다.      


“뚫고 나가지 않고 내 구역에 더 이상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 해도 인간 대 인간으로 응원만 할 거야"

그 말을 듣고 있던 동네 언니는 대성통곡을 한다. 왜 우냐는 물음에 대답 대신 울면서 시키는 닭똥집 하나. 

우습게 슬픈 공감이 생겼다.     


‘가족에게도 받지 못한 응원을 누구에게 받을 수 있으며, 누구에게 제대로 응원할 수 있을까?’

시간에 갇힌 방안에 해방의 바람이 불었다.

      

기정, 창희, 미정, 구 씨, 태훈이란 인물을 그려 넣고 

해방과 추앙, 계란 노른자와 흰자를 메모했다. 

종영되지 않은 드라마지만 그 인물에게 몰입하려면 적어도 다섯 번은 더 봐야 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밤에 ㅆ.ㄴ 글ㅇ.ㄴ 주사 같다.

드라마 보기를 강제로 멈추고 어둠 속에서 한 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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