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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원 May 14. 2022

서촌에 스며든 농담

미모 비수기가 된 지 3년째다.

남은 삶에 성수기를 맞이하는 날은 없을 것 같다.     


오랜 시간 의류매장을 운영했던 난, 식사 시간이 규칙적이지 못했다. 규칙적이지만 않았던 게 아니라 최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출근길에 먹은 아침은 김밥이나 토스트였고, 점심은 서너 시쯤 대충 먹었다. 의류매장임에도 불구하고 점심시간을 이용한 쇼핑객이 있었기 때문이다. 퇴근 시간 전후는 피크 타임이라 결국 저녁은 마감 후에 챙겨야 했다. 10시 폐점 후 마감하고 나면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빨라야 11시다.

자정 가까운 시간에 먹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지만 하루 중 가장 여유 있는 시간이 그때였다.

먹지 말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날에 허기짐과 스트레스를 이월시킬 수 없었다. 허울 좋게 야식이라 칭하면서 꿀주와 함께 하루를 털고 그렇게 몸을 키워나갔다.      


춘계 씨름대회 나가는 것도 아닌데 몇 년을 그렇게 무식하게 살았다. 몇 달은 그렇게 지내고 또 그렇게 지낸 것보다 더 많은 시간으로 다이어트를 하고 다시, 다시를 무한 반복했다.

그나마도 그때는 젊음의 텐션으로 복구가 가능했지만, 잦은 반복으로 인한 탄력은 점점 기능을 잃었다. 그에 대한 결과물이 나온 건 3년 전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밤새 누군가에게 맞은 것처럼 퉁퉁 눈이 부어있었다. 라면 먹고 잔 모습이 아니라 타이틀매치에서 맞은 눈이었다. 자면서 접힌 눈두덩은 꼬깃꼬깃해져 쉽게 펴지지도 않았고 양쪽 볼과 콧등에 번진 열꽃은 목선까지 타고 내려가 갓 구운 소보로 빵처럼 두껍게 올라왔다. 거울과 마주한 얼굴은 그 속에서도 스멀거렸고 참기 힘든 가려움은 잠들기 전까지 나를 괴롭혔다.     


시간을 쪼개 괜찮다는 피부과를 다니고 유명하다는 약국에서 처방약을 받아 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이 괴물 같았고 구겨진 하루를 버티는 게 힘들었다.      

“급격한 면역력 저하와 스트레스로 인한 알레르기입니다.”

반칙으로 사용한 인맥을 통해 어렵게 예약한 대학병원에서 정답을 찾았다. 그렇게 반년 넘게 치료하면서 긴 시간 꾸려왔던 의류매장과 결별했다.      


모처럼 동생들과 모임이 잡혔다.

한 친구가 일 년 살이로 터키에 간다고 했다. 같이 먹자는 밥 한 끼의 명분은 꽤나 멋스러웠다.  

목적 없이 나가는 걸 끊었던 나는 그 약속이 반가웠다.      


그런데! 전조 증상이 나타났다. 몸이 자꾸 가라앉고 가만히 있어도 얼굴이 땅기는 느낌이 들었다. 오후가 점점 무거워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아침에 만난 내 모습은 불어 터진 수제비 같았다.  

그동안 성심성의껏 유지했던 컨디션이 단번에 무너졌다.

3년 전처럼 기하학적으로 눈이 부었고 눈두덩에 세로로 주름이 만들어졌다.

여러 가지 수를 놓고 고민을 했지만, 약속에 진심이었던 난 미모 비수기로 기꺼이 나갔다.    

  

만남의 장소 ‘종로도서관’ 11시.

2020년에 100년이 된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 도서관」 앞이었다.

사직공원을 가로질러 돌계단을 걸어 올라가면서 내내 의아해했다. 보통 만남의 장소는 찾기 쉬운 번화가나 지하철역 입구 몇 번 출구쯤인데 그곳은 한적함을 넘어 행인도 만날 수 없었다.

“나, 잘못 찾아왔나 봐. 여기가 아닌 것 같아. 사람이 아무도 없어”

자차로 오는 친구는 터키 가는 친구가 도서관에서 공부 중이라고 했다. 장소의 낯섦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세 사람은 어제 본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오랜 시간으로 달라진 외모도 ‘변함없음’으로 일괄되게 칭찬하며 밥집으로 갔다.

그 집은 터키 가는 친구가 4년간 다닌 단골집이라고 했다. 좋은 사장님을 만난 건지 그 친구의 싹싹함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공짜 밥도 많이 먹었다고 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

“오늘은 내가 사는 거야”

“오늘은 바람도 불고 비도 오고”

무슨「도깨비」에서 나오는 공유 대사처럼 갖은 구실을 붙여 밥을 줬다고 했다.

“두 사람은 돌솥비빔밥. 삼촌은 빼기 돌솥”

일하는 분이 웃으며 밥을 놓고 갔다. 사장님은 깡마른 삼촌에게 늘 곱빼기를 주셨던 것 같다.     

적당히 배를 채운 우리는 서촌 골목을 누비며 ‘아인슈페너’ 3대 맛집 중 한 집을 방문했다. 유명한 집이어서인지 웨이팅이 있었다. 운 좋게 창가 쪽으로 앉은 우리는 언어와 기억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토론식 대화는 찰진 휘핑크림 같았다. 머리에서 생각나는 단어가 입으로 나오지 않는 처지는 서로 비슷해 웃음으로 넘어가기 일쑤였다. D.P 영화를 G.P로 천연덕스럽게 설명하면 있는 그대로 진지하게 받아 양껏 놀리며 웃었다. 언어로 시작한 얘기는 기억과 동감으로 넘어갔고 결국 수다에 깔린 엉덩이가 아프다며 우린 다시 또 걷기를 시작했다.      


박노수 미술관에서 작품을 구경하면서 작품보다 고택에 더 관심을 가졌고, 서촌 골목을 채운 안데르센 동화 같은 상가를 구경하며 「사직동 그 가게」에서 ‘짜이’로 마무리했다.

‘생강 밀크티’ 같은 짜이의 맛은 마무리에서 는 개운 함이었다.

      

우리는 빼기 삼촌에게 말했다.

“너, 터키 가기 전에 네 단골집 사장님한테 가족 소개하려 한 거 아냐? 이모랑 누나라고!”

웃고 침묵하다 또 웃었다.      


서촌 나들이는 기약 없는 또 다른 만남을 묶어주고 끝났다.

침묵의 어색함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짜이: chai(차이) 인도를 비롯한 남아시아 지역에서 차(茶) 음료를 일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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