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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rs Fong Jun 24. 2020

드디어 마카오에서 출산을 하다

마카오에서 임신, 출산 하기 Chapter 5.


  5월 6일 아침, 예정일 일주일 전. 갑자기 이슬이 비췄다. 이 이슬이라 함은 출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하다. 여기서 이 '이슬'이라는 단어 자체는 상당히 애매모호한 구석이 있다. 임신 관련 서적이나 정보를 찾아보면 "이슬이 비추고 진통이 5분 간격으로 찾아오면 병원에 가시오"라고 하지만 도대체 이 이슬이 뭐란 말인가? 내가 아는 이슬은 이른 새벽 풀잎에 머금은 물방울 이거나, 시원하게 한잔 걸치는 참 이슬 밖에 없는데, 출산과 관련된 이 이슬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결국 출산 경험이 있던 친구에게 이슬에 대해 물어봤다. 여성의 신체나 생리현상에 관련해서는 왜 이렇게 에둘러 말하는 단어가 많은지 모르겠다. 이를테면 한 달에 한번 걸리는 마법이라던가, 출산 전 나오는 이슬이라던가, 출산 후 나오는 오로 라던가. 여자라면 다 알겠지만 마법은 한 달에 한 번만 걸리는 게 아니라 일주일 정도 지속이 되며, 출산 전 나오는 이슬은 우리가 흔히 하는 이슬과는 전혀 다른 색깔이고,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오로는 분만 후 나오는 분비물이다.


  아무튼 내가 알던 이슬과는 전혀 다른 '이슬'이 비춘 그 날 저녁부터 듣기만 했던 진통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불규칙하게 오기 시작했고 지속시간 또한 불규칙했다. 싸르르 배가 아픈 생리통 같은 느낌이랄까? 이제 시작이구나 하는 느낌에 샤워를 하고, 혹시 모를 출산에 대비해 마지막 만찬으로 한국 레스토랑에서 삼겹살로 든든히 배를 채운 뒤 진통 주기가 5분 간격으로 오던 새벽 2시, 병원에 갔다.


  5분마다 오는 진통의 횟수와는 다르게 나의 자궁문은 겨우 1센티 밖에 열리지 않은 상태였다. 의사는 1센티 밖에 열리지 않았으니, 집에 다시 가서 기다리던지 원하면 입원을 하라고 했다. 진통 시간을 체크하는 어플로 진통 주기를 보여주니 의사는 일단 입원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결정을 내렸다.


  5분마다 오던 진통도 내 기준에선 나름 '참을만한' 진통이었다. 이 정도 진통이 시작이라면, 그래 뭐 참을만하다, 해볼 만하다 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도 잠시. 내가 겪었던 진통은 진진통의 시작도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강렬해지는 진통. 5분마다 찾아오며 아주 짧은 1분이라는 시간 동안만 지속되었지만 그 1분은 꽤 고통스러웠다. 진통할 때 가장 중요한 숨쉬기. 코로 숨을 들이쉬고 입으로 후- 하고 깊게 내뱉는 단순한 호흡이지만 진통이 시작되면 그 단순한 호흡마저 불가할 정도로 힘이 들었다. 새벽 2시에 시작된 진통은 점점 더 강렬해지며 7시까지 이어졌다. 반복되는 격한 숨쉬기로 인해 입덧 때도 하지 않았던 구토를 계속했다. 밤샌 진통에 졸면서 비몽사몽 진통을 했다. 아침 7시, 자궁문이 3센티가 열렸다는 이야기와 함께 분만실로 이동했다.


  마카오에서는 자궁문이 3센티만 열리면 일단 무통주사가 들어갔다. 7시에 들어가기로 했던 무통 주사는 갑자기 긴급 수술이 들어가야 하는 산모로 인해 1명뿐인 마취과 선생이 수술실로 향하는 바람에, 그 마취과 선생을 3시간이나 기다리며 10시까지 진통을 더 해야 했다. 자궁문이 점점 더 열릴 때마다 진통은 강렬해졌다. 중국인과 마카오인으로 구성된 간호사들은 4명의 인원이 나를 돌아가며 혈압체크와 함께 내진을 하며 간호해 주었지만, 언어 장벽으로 인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설명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자궁문이 얼마나 더 열렸나 정도만 알 수 있었다.


  내가 가장 우려했던 부분인 의료 부분이나 언어장벽 부분은 생각보다 큰 산은 아니었다. 분만실은 넓고 깔끔하고 쾌적했으며, 나를 위해 클래식과 한국 노래도 틀어 주었다. 영어가 유창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이해 가능할 정도로 설명을 해주었고 나의 엉터리 중국어로도 대충 상황을 짐작 가능할 정도는 되었다.


  마취과 선생을 기다렸던 그 3시간이 나에게는 영겁의 세월이었다. 이렇게 진통을 하다가 출산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정도로 아프다면 대략 못해도 6~7 센티는 열렸겠다 싶었다. 진통이 심하니 내 몸이 컨트롤되지 않았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다리도 덜덜 떨렸다. 다시 내진을 했다. 영겁의 3시간 동안 진행된 자궁 문의 크기는 고작 4센티였다. 간호사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아직 4센티 밖에 열리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 심경은 정말 말 그대로 '죽고' 싶었다.


  수술을 해달라고 할까. 이제 고작 4센티인데 이 정도의 고통이라면 출산이 가능한 10센티 까지는 더 얼마나 많은 고통의 시간을 진통해야 할까. 사람이 너무 아프면 기절할 수 있지 않을까? 10센티 까지 가기도 전에 아파서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냥 말 그대로 딱. 죽고 싶은 심경이었다. 진통을 할 때마다 간호사들은 같이 호흡해주고 손을 잡아 주었다. 꽤 두꺼운 혈관 주사가 들어간 손이 어떻게 되거나 말거나 침대 옆 난간을 붙잡고 진통을 했다.


  마취과 선생이 드디어 오고, 나에게 종이를 내밀며 서명을 하라고 했다. 그 종이에는 분명 유의사항이라던가, 부작용이라던가 그런 내용들에 동의를 하겠냐는 내용이었겠지만, 내용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에게 필요한 건 그저 무통주사였다. 읽어보지도 않고 힘겹게 쥔 볼펜으로 낙서하듯 사인을 했다. 등을 새우처럼 구부린 상태에서 척추에 주삿바늘이 들어갔다. 이 정도 아픔은 아픔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이 고통이 멎길 바랄 뿐이었다. 척추에 꽂아진 주삿바늘에 진통제가 들어가자, 척추뼈를 따라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며 신기하게도 진통이 멎었다. 나는 운이 좋게도 무통빨이 잘 드는 체질이었던 것이다.


  무통주사는 부작용도 크고, 안 맞는 사람도 있으며 효과가 전혀 없는 사람도 있다. 천운으로 무통이 잘 맞았던 나는 그 뒤로 너무나 평화롭게 분만실에서 숙면을 취했다. 물론 무통주사로 인해 진행속도가 더디어지는 바람에 완전히 자궁문이 열리는데 5시간이 더 걸렸고 촉진제를 맞아야 했지만, 정말 살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깊은 숙면을 취하고 어느 정도 에너지를 회복했지만, 속이 좋지 않아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물마저도 마시기가 힘들었다. 간호사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어 출산이 힘들 수 있으니 미음이라도 먹어야 한다며 곱게 간 쌀죽을 먹여주고 물도 먹여주었다. 무통주사로 인해 하반신은 마비가 된 것처럼 아무 느낌이 없었다. 운동성은 살아있기 때문에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아무 감각도 느낄 수가 없었다.


  자궁문이 다 열리고, 분만 준비에 들어갔다. 무통으로 인해 아무 감각이 느껴지지 않으면 아기를 밀어낼 수 없으므로 척추에 지속적으로 들어가던 무통주사를 껐다. 서서히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하면서 간담이 서늘한 진통이 다시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제 다 왔다. 조금만 더 힘내자. 나는 할 수 있다. 이것만 이겨내면 내가 이 세상에 못 할 일이 뭐가 있겠나.라는 마음으로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넌 할 수 있어'라고 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아기가 나올 때의 온도에 맞추어 분만실에서 돌아가던 에어컨도 가동을 멈추었다. 마카오의 무더운 5월에 맞게 분만실은 이내 후덥지근 해졌다. 간호사는 밀어내고 싶은 느낌이 들 때 조금씩 밀어내 보라고 했다. 도대체 밀어내고 싶은 느낌이 뭔가 싶었지만, 이내 진통이 올 때마다 밀어내고 싶은 느낌이 뭔지 깨닫게 되었다.


  숨을 참고 밀어내기를 반복하다, 간호사가 '이제 머리가 보인다'라는 말을 하자 어서 빨리 출산을 마무리 짓고 싶은 생각에 정말 '젖 먹던 힘'까지 모두 끌어모아 밀어내기를 계속했고, 40분 여 만에 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아기가 나올 때의 느낌은 이루 설명하기가 힘든 느낌이었다. 내 몸의 일부분이 빠져나가는 느낌이랄까?


  혹시나 진통할 때 울면 아기에게 산소공급이 안될까 꾹 참았던 눈물이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쏟아져 나왔다. 코로나 때문에 남편이 분만실에서 함께 할 수 없어, 나와 아기를 이어주고 있던 탯줄은 간호사에 의해 잘려 나갔다. 마카오 분만실은 산모가 볼 수 없도록 가려주는 가림막이 없었다. 아이가 나오고, 태반이 나오고, 회음부를 자르고 꿰매는 모든 과정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 눈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건강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간단한 검사와 처치를 한 후에 내 가슴 위로 아이를 안겨주었다. 방금 막 태어난 아기는 신기하게도 눈을 뜨고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뱃속에서만 태동으로 느꼈던 아기가 실제로 내 눈앞에 안겨있다는 사실이 믿기 힘들었다. 무통주사를 맞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출산을 해서 그런지, 출산 후 몸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출산에 대한 막연한 공포는 겪어보니 생각보다는 괜찮았다. 아마 운 좋게도 모든 것이 큰 이벤트 없이 잘 흘러갔고, 무통이 잘 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출산 후 50여 일이 지났다. 이제야 겨우 노트북을 열어 글을 쓸 수 있는 작은 여유가 생겼다. 지금 돌이켜보면 마카오에서 출산을 한다는 공포를 잘 이겨낸 나 자신이 대견스럽기도 하지만, 사실 출산은 육아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누군가 나에게 출산을 5번 하는 대신, 바로 아기에게 100일의 기적이 찾아오게 해 준다면 망설임 없이 출산 5번을 선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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