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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소장 Aug 11. 2024

오늘 사주 어플을 지웠다

오늘 사주 어플을 지웠다. 아니, 어쩌면 예전부터 지웠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사주는 미신이 아니라 통계학이라는 말을 듣고 재미 삼아 어플을 깔았다. 사주 어플은 그날 운세를 점수로 보여준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사주 어플에 들어가 그날 점수를 확인하고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 점수는 100점이었다. 눈 뜨자마자 기분이 좋았다. ‘스스로를 믿고 과감하게 나아갈 하루’라는 말을 보며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탄력 근무하는 날이라 한 시간 일찍 출근해서 한 시간 일찍 퇴근한다. 퇴근 후에는 스파 브랜드에 가서 티셔츠 두 장을 살 계획이었다.


오늘은 흰색 티셔츠를 입었다. 거울 앞에 서보니 티셔츠에 검은 얼룩이 보였다. 검은 옷과 같이 빨래를 해서 검은 물이 들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옷을 벗어 구석에 던졌다. 온라인에서 티셔츠 세 장을 사면 무료 배송이지만, 두 장만 사면 택배비를 지불해야 한다. 오프라인 매장에 가려는 이유는 택배비와 쓸데없는 소비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세 장은 필요 없었지만, 얼룩 때문에 결국 세 장을 사게 되었다. 스파 브랜드 어플을 열어 티셔츠 세 장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퇴근 후에 옷을 사러 가지 않아도 된다.

오늘 할 일이 사라졌다. 뭘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이번 장마철, 운전하다가 앞 유리에 떨어진 빗물이 잘 닦이지 않아 고생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자동차 유리와 사이드 미러에 발수 코팅제를 바르기로 했다. 주차장에서 발수 코팅제를 듬뿍 뿌리고 부드러운 걸레로 유리와 거울을 닦았다. 장비 정리를 마치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가 올 것 같았다.


오늘 비 소식은 없었다. 너무 더워서 점심에 밀면을 먹었다. 그것도 ‘대’자로 주문했다. 햇볕이 뜨거워 두피가 불타는 느낌이었다. 비는 상상도 못 했다. 하늘이 어둑해지더니 주차장에 천둥소리까지 울려 퍼졌다. 아침에 입었던 흰 티셔츠처럼 바닥이 물들어갔다. 비가 쏟아졌다.

오늘 운세는 분명 100점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과감하게 나아갈 하루’라고 했는데, 하는 것마다 나아가지 못하는 하루다. 우산도 없었다. 재빨리 차에 타서 수영장으로 향했다. 수영장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놓으면 비를 맞지 않는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오늘은 뭘 해도 되는 날이라 생각했다. 아니었다. 지하 주차장은 만차였다. 혹시 몰라 주차장을 천천히 돌며 빠져나가는 차를 기다렸다. 주차장을 세 바퀴째 돌 때였다. 어디선가 차 한 대가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후진했지만 한 발 늦어버렸다. 뒤따라오던 차가 재빨리 빈 공간을 차지했다. 짧은 탄식을 내뱉고 결국 야외 주차장으로 올라갔다.


오늘 오리발을 차고 운동하는 날이다. 평소 같았으면 가방만 챙기면 되는데, 오늘은 오리발까지 챙겨야 한다.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때 엘리베이터에 타는 사람들이 보였다. 비만 안 왔으면 충분히 뛸 수 있는 거리였지만, 빗길이라 어기적어기적 뛰었다. 엘리베이터에 있는 사람들은 일부러 내 눈을 피하는 듯했다. 문이 닫혔다. 다음 엘리베이터를 탔다.

오늘 받은 스트레스는 오늘 꼭 풀어야 한다. 수영장은 나에게 오늘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신성한 공간이다. ‘술보다 물로 푼다’는 나의 좌우명처럼, 수영은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주차난과 눈앞에서 놓친 엘리베이터 때문에 수영 시간에 지각하게 되었다. 재빨리 샤워를 마치고 옷을 챙겨 입은 뒤 수영장으로 갔다.


오늘 따라 몸이 가벼웠다. ‘과감하게 나아갈 하루’라고 했는데, 이 순간을 두고 하는 말이었나 보다. 하루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럼 어때, 물속에서 100점이면 된다. 역시 나는 수영장에서 가장 멋있다. 그렇게 한참 물살을 갈랐다. 기분이 이상했다.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때 뒤에 있던 사람이 내 가슴 쪽을 가리켰다. 아, 니플 패치가 붙어있었다. 접영을 해도 떨어지지 않는 니플 패치의 접착력, ‘세호 형, 이 제품 정말 좋네요.’


오늘 하루는 엉망이었다. 되는 일이 없었다. 사주 어플은 오늘이 육각형 운세라고 했다.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사주 어플에서 매겨주는 점수가 그날에 임하는 마음이었다. 30점이면 포기한 듯 하루를 보냈고, 90점이면 그날의 모든 순간이 값지고 귀한 시간이라 여겼다.

 오늘 하루의 점수는 이제 내가 정한다. 50점밖에 안 되는 운세라 해도 내가 노력하고 성취해서 점수를 올리면 된다. 반대로 90점이지만 대충 살고 성의 없이 보낸다면, 점수가 깎여서 오히려 50점보다 못한 오늘이 될 것이다.


 오늘 아침은 10점에서 시작하더라도 잠자리에 들 때는 100점으로 마무리하는 ‘오늘’을 살자. 사주 어플은 이제 안녕. 앞으로 ‘사주’를 믿기보다 나에게 고기를 ‘사주’는 사람을 더 믿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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