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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승찬 Aug 16. 2021

개성이라 포장된, 추함의 껍질을 벗기며

아, 초면에 좀 미안한데..
나는 승찬이 꼽고 싶어.


  대학교에 막 들어간 신입생 시절, 선후배들이 한 방에 모여서 다 같이 술을 마셨던 적이 있습니다. 아직은 낯선 알코올의 향, 낯선 선배들, 그 속에서도 이제는 익숙한 사람이 되어보겠노라 하는 당찬 1학년의 마음가짐과 함께 술 게임에서도 한 번 빼지 않고 가열찬 원샷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 진실게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래저래 즐거운 질문이 흘러가던 중, 한 선배에게 '이 중에 가장 못생긴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이 나오자 그 선배는 몇 초의 고민도 없이 저를 꼽으며 저렇게 말했습니다.


  공감한다는 마음을 숨긴 채 걱정된다는 분위기와 함께 저에게 모든 눈빛이 꽂히던 순간. 저 또한 그들 기대에 부응하듯 모든 걸 안다는 듯 웃음을 참는 표정을 하며 " 나 참.. 저 선배 좋게 봤는데 엉망이었네.."라고 말하며 말 끝을 흐렸고 모두가 빵 웃음이 터져 키득대기 바빴습니다. 이후 게임과 함께 몇십 잔의 술이 다시금 정신없이 오갔습니다. 저는 2시간의 통학을 하던 때였기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먼저 빠져나오면서도 ' 의외로 은근히 웃긴다' 따위의 칭찬을 들으며, 그날의 술자리는 좋은 분위기로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가던 버스 안 불이 꺼지고,

  꽤나 많은 눈물을 쏟았던 것 같습니다.


  못생긴 외모. 절대적으로 내가 선택할 수조차 없던 것.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나를 더욱 절대적으로 낮은 가치로 자리 잡게 한 것.


  창에 비친 제 모습을 다시금 바라보고는  앞의 빈 좌석에 조용하게, 하지만 다신 모두가 나를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마를 찧으며 스스로를 혐오했습니다. 눈물로 흐려진 눈 덕에 더욱더 일그러진 내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었습니다.


  사실 가볍게 조롱받는 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졸업 앨범의 콘셉트를 '성장'으로 만들 거라며 훨씬 어리던 시절과 비교되도록 유치원 다닐 때 사진을 가져오도록 한 적이 있습니다.


  당연한 과정으로 "어릴 땐 귀여웠는데 지금은 좀 삭았네"라는 장난이 따라왔습니다. 항상 어머니의 미화된 미적 기준에서의 허울 안에서만 존재하고 있던 저에겐 충격적이게도, 그때가 처음으로 나의 못생김을 깨달았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그나마 그때까진 작지 않은 키라고 분류되던 제가 점차 크지 않은 키로 변모했고, 이내 평균 이하에서 멈춰버렸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로 갔을 때쯤엔-


이걸로, 정말 끝이구나.


  꽤 많은 걸 스스로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 내려놓는다는 기준에는 오직 저에게만 적용되는 알듯 말듯한 이기심이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겉으로는 그냥 평범하고 기억에 남지 않을 못생긴 소심한 친구 정도였지만 속의 감정은 켜켜이 쌓이더니 밀푀유처럼 두꺼워져, 마음 깊은 곳에선 내려놓지 못한 자격지심이 되어 어느 순간부터 남들의 외모를 뜯어보는 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다만 1차원적으로 외모를 평가하는- 이를테면 '쟤는 분명 저기 고쳤을 거야' 정도로 대표되는 미용실 아주머니들의 토크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저는 남들을 보며 행복의 1차 척도를 외모로 평가했던 것 같습니다.

  조금 더 들어가자면, 경외심이 들었습니다.


  "쟤는 잘생겼으니까 얼마나 살기 좋을까"

  "쟤는 예쁘니까 편한 부분 분명히 있겠다"


  얼마나 짧은 생각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에도 알고 있었습니다. 허나 어린아이가 가판대의 물건을 쉬이 놓지 못하듯, 저 또한 그들이 가진 외모의 가치가 내가 가진 주머니의 어느 것보다 비싸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단념할 수 있었으니까. 내가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비로소 마음에 가난이나마 스며들어 열등감이 만든 공허함을 메워줬으니까.


  그럴 때마다 저의 가치는 조금씩 낮아지는 듯 했겠지만 뭐, 사실 크게 상관없었습니다. 드디어 내가 생각하는 나의 가치에서 거품이 빠져서- 세상에 형성되어있는 나 정도 사람의 물가가 타협점을 잡아가는 것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건 자존감을 챙기라는 어설픈 조언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 '평범함'이라는 바운더리에 들어가기 위해 내 자존감을 팔아 부도지폐라도 마구 찍어내서 세상의 환율에 숫자라도 맞추는 인플레이션형 노력이라도 필요했습니다. 그야말로 '생긴 대로 논다'는 말이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대학교 때의 그 트리거는 결국 아무리 스스로를 평범함으로 포장하려해도 밑돌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만드는 날이었습니다. 그냥 내가 못생겼다는 사실도, 조롱섞인 웃음을 들었다는 것도 아닌 내가 마음을 굳게 먹어봐야 바뀌지 않는 불가항적인 어딘가에 부딪힌 것에서 온 탈력감에 그렇게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다행히도 저는 이 외모를 가지고도, 이 못난 외모를 가지고도, 눈을 뜨고 있어도 코를 베어간다는 서울에서 평범 조금 아래의 삶을 향유하고 있는 데에는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뭐, 코가 낮은 탓에 베어가지 못했다는 생각도 간혹 들긴 합니다 더는 중요한 사실도 아닙니다.


  이제 이 글이 만약 필독서가 되려는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면 '하지만 저는 그 모든 걸 이겨내고 이렇게 당당하게 살고 있답니다. 짜잔. 여러분도 자신 있게 본인을 보여주세요. 외면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바로 스스로를 바라보는 마음이랍니다' 정도의 말로 아름다운 끝맺음을 해야 할 것입니다.


  허나 전 그럴 수 없습니다.


  물론 외모가 성공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딱 그뿐입니다.


  적어도 아직도 열등감에서 헤엄치는 제가 여지껏 겪어온 세상은 함부로 그런 희망을 기댈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강아지 한 마리를 입양하더라도 더 귀여운 친구를 데려가려고 하며, 게임 캐릭터 하나라도 본인 취향에 맞게 아름답게 만들려는 세상입니다. 그렇게 태연자약한 소리를 하는 건 제 양심에 어긋날 뿐 아니라 듣는 사람조차도 공감하지 못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자기혐오는 제겐 일상입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사이에 이제 겨우 자리 잡은 자부심과 자존심이 조금 억세고 거칠게 자라나 약간의 인지부조화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외모에 관심을 안 가지는 척하며 피부과로 향하고, 타인의 시선에 무관심한 척 새 옷을 사고 있는 저를 보노라면 남에게나 지을 만한 실소를 스스로에게 보내게 됩니다.


  이미 알고 있습니다. 조금 내 얼굴이 반질해진다고  인생이 크게 달라지진 않을 거고, 새 바지를 입는다고 내가 누군가의 이상형이 되진 않을 것을. 허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도태되는 속도엔 더욱 가속이 붙을 거라는 강박이 들어 쉬이 포기하기 힘들었습니다. 최소한 개성이라도 있는 척을 해야 경쟁의 후미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이에 무관심한 척하지 않으면 '관심이 있는데 이 정도 수준'이라는 꼬리표가 내 가격표의 할인 요인이 될까- 두려운 게 사실이었습니다.


  어쩌면 환청조차도 들리지 않아 공포스러운 무관심이 싫어서, 어떻게건 헤엄쳐 살아보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편한 죽음을 누구보다 바라면서 누구보다 힘들게 발악하며 좀 나은 사람으로 보이려 발버둥 치는 모습이 꽤나 우습습니다.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조소 어린 실소를.



  오늘도 세수를 하다가 거울을 바라봅니다. 차라리 깨어졌으면 하는 헛바람과 함께 다시 고개를 세면대에 처박고 비눗물을 헹궈냅니다. 그리고 수건으로 닦아내며 대학교 1학년, 그때의 술자리를 떠올려봅니다.


  여전히 그때 새겨진 상처로 인해 제게 지워지지 않을 속상한 부분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다만 그에 대한 원망은 말을 꺼낸 선배를 향하지도, 질문을 던진 선배에게 향하지도 않을 겁니다.


  다만 제가 속상한 건 그 누구도 탓할 수 없이 그저 운에 의해서, 내 운명에서 꽤 중요한 일부가 결정되었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가 평생 동안 마주해야 하지만 평생 동안 만족하지 못할 무언가를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것.


  단지 그뿐입니다.


- 2021년 5월, 술 마시고 썼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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