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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휘 Jun 12. 2024

수박, 내 더위를 사 가렴

 수박을 고를 때 가장 달콤해 보이는 빛깔 좋은 친구를 고르기 마련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무게가 덜 나가는 녀석으로 고르기 위해 고심하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면 나는 한없이 나약하고 기운 없는 인간이 되고 만다. 나에게는 이것을 집까지 한 손으로 들고 갈 만한 힘이 없는 것이다. 다른 수박이 조금 더 맛있고 좋아보여도 훨씬 더 무겁다면 미련 없이 포기해야 한다. 헬스장에서 7kg 짜리 케틀벨도 제대로 들어본 적 없는 내가 7kg의 수박을 들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쪽은 알록달록한 그물 노끈이 아니라 나의 힘줄인 것만 같다. 


 수박은 크다. 속에 굉장한 걸 머금고 있을 것 같은 특유의 풍채 때문에 열어보기 전부터 압도된다. 무늬를 가만히 보면 숲 속 같기도, 잘 훈련된 군인이 갖춰 입은 카모플라주의 행색 같기도 하다. 나는 누구보다 호기롭게 수박 앞에 선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칼을 쥔다. 그러나 수박은 한 획에 쉽게 무너진다. 이렇게 연약하게 쓰러질 거면서 왜 그렇게 센 척을 했는지는 안에 들어 있는 달콤하고 연한 과즙을 보면 납득이 된다. 달콤하고 상쾌한 여름의 분위기를 끝까지 지켜내기 위해 이렇게 두껍고 단단한 껍질을 가져야만 하는 수박의 자존심과 당위성을 저절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밤 마트에서 나는 여름을 샀다. 아침에 일어나 양손으로 수박을 꺼낸다. 혼자 먹기엔 너무 큰 수박을 사무실에 가져가기로 결심한다. 얼음 조각가처럼 조심히 수박의 흰 살을 걷어내고 몇 번의 칼질을 거치면 수박은 가지런한 네모 모양이 된다. 플라스틱 통에 나란히 담아놓고 우쭐한 마음에 사진도 찍어 본다. 나눠 먹을 생각에 마음이 먼저 설렌다. 


 캔버스 백에 수박이 담겼다는 사실 하나로 출근길의 나는 자신만만해진다. 그러다 버스가 11분 후에 도착한다는 알림을 보고 다시 시무룩해진다. 더운 공기에 수박이 식을까봐 걱정이 된다. 차가운 것도 식을 수 있다는 사실은 이럴 때 깨닫게 된다. 다행히 나는 수박이 식기 전에 회사에 도착한다. 


 냉장고에 놓인 수박을 발견한 피디님이 다가와 근사한 아이디어를 건넨다. 


 “작가님, 수박 있고 얼음 있고 사이다가 있으면 뭐다?”

 “화채.”


 그렇게 거대한 수박화채의 연대가 생긴다. 그 시간부터 내 머릿속에는 빨간 땀을 흘리며 우리가 먹어주기만을 기다리는 수박만이 존재한다. 싸르르- 매미보다 여리게 우는 사이다의 탄산이 수박 위를 파도처럼 덮으면 우리는 그 안에서 밀물과 썰물처럼 여름의 행복에 뒤섞일 것이다. 그렇게 더위로부터 잠시 도망가서 달콤하고 시원한 꿈을 꿀 수도 있을 것이다. 수박은 어디까지가 피부일까. 우리가 먹는 것은 수박의 마음일까 양심일까. 그걸 여름이라고 부르는 걸까. 올해 초에 누군가에게 내 더위를 팔았던 것 같은데 그 보답을 지금 이 수박으로 받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모니터에 뜬 수많은 화면들은 내 시야에서 잠시 사라지고 나는 수박과 춤을 춘다. 내 마음은 벌써부터 냉장고에 가 있다. 어서 빨리 수박에 얼굴을 묻고 싶다.


 이 장엄한 서사의 결말이 아름다운 화채의 탱고를 추는 나의 모습으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오늘따라 사무실은 조용하고 열 명이 넘는 제작진이 책상에 앉아있다. 나는 담담하게 화채를 포기했다. 대신 종이컵에 여러 조각씩 담아 이쑤시개를 꽂아 사람들에게 건넸다. 마치 동남아의 한 과일 장수처럼. 돈은 안 받아요. 그냥 드셔보세요. 모두에게 인심 좋게 건네고 나니 내가 먹을 수박은 손바닥보다 작은 한 조각만이 남았다. 그래도 좋았다. 그냥 한 통을 몽땅 다 썰어 올 걸, 그럼 더 많이씩 나눠줄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제일 아쉽다. 화채 퍼포먼스는 안전하게 내일로 미뤘다. 


 우리는 오늘 같은 넝쿨에서 주렁주렁 열린 수박들처럼 사이좋게 하나의 수박을 먹은 사이가 됐다. 겉으로 보기엔 하나도 안 친해진 듯하지만, 같은 태양 같은 바람 같은 비 같은 흙을 먹고 자란 수박의 기운은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들어와 있다. 이게 수박의 힘이다. 무더운 여름, 우연히 발견해서 기쁜 안전한 그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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