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벌레는 죽이는 거 아니래. 러브버그는 익충이래. 그런 말들을 들으면 궁금해진다. 세상에 죽어 마땅한 것도 있을까. 그런 건 누가 결정하는 걸까.
언젠가부터 벌레를 바라보면 주저하게 된다. 가끔 작은 거미를 발견하면 휴지로 세심하게 감싸 밖에 놓아주곤 한다. 그런 나도 참 따져보면 이중적이다. 어떨 땐 세상 차가운 얼굴을 하고서 해충 박멸만이 유일한 유희인 것처럼 초파리와 모기를 죽여대면서 또 어떨 때는 조그마한 무당벌레의 걸음걸음을 구경하느라 버스 몇 대를 보낸다. 이러나저러나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이 작은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지켜보는 내내 새삼 기분이 이상해진다.
얼마 전 누군가 아이스크림을 흘려놨는지 아파트 단지 흙길에 유독 개미가 많이 모여 있었다. 출근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둘러야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단 한 마리도 밟지 않으려고 까치발을 들고 이리저리 뛰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개미의 경로와 나의 발자국이 겹치지 않으려면 짧은 순간에 집중력을 많이 써야 했다. 겨우 계단을 내려오고 나서 한 숨을 돌리며 생각했다. 아끼는 마음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나는 언제 또 무심코 개미를 밟게 될까. 그동안 숱하게 밟거나 죽여 온 모든 생물들을 오늘따라 살리기 위해 힘쓰는 건 또 무슨 심보일까. 은행나무 열매를 피하며 걷는 것과 개미를 밟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은 또 어떻게 다를까.
뭔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매일같이 너무나도 달라서 관대해졌다가 옹졸해졌다가 한다. 언제까지나 새 것처럼 애지중지하기도 하고, 땅에 우당탕 떨어트려도 대충 먼지만 털고 주워서 다시 쓰기도 한다. 노트 첫 장은 끝내 아무것도 적지 못하면서 비싼 노트북은 파우치도 없이 아무렇게나 들고 다니는 것처럼 기준도 크기도 다르다. 그 크고 작은 마음들 때문에 작은 벌레 하나를 귀하게 여겼다가, 아무렇지 않게 눌러 없앴다가 한다.
사실 아침에 개미를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나는, 저녁에 사무실에 들어온 방구벌레를 미련 없이 죽여 버리고 말았다. 인간은 어쩌면 이리도 뻔뻔하고 이중적일까. 어쩌면 나는 회개할 길이 없어서 이렇게 앉아서 긴 추모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방구벌레의 명복을 진심으로 빌면서. 푹푹 찔리는 양심을 메꿔줄 만한 것이 없나 하고 아침에 구한 개미들의 목숨을 괜히 헤아려 보면서. 이렇게 해서는 그 어떤 것도 갚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풋 샴푸를 사용하면 벌레가 질식해서 빨리 죽는다는 걸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은 어쩌면 인자한 사람일지 모른다. 고통스럽지 않은 빠른 죽음, 어쩌면 벌레들에게 그건 숭고한 죽음일지도 모르니까. 오늘만큼은 내가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