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졔졔 Jan 04. 2022

1월의 네 번째 날, 작심삼일의 분기점에서

2022.01.04


며칠 전 페이스북이 2018년 1월 2일에 올린 글을 추억이랍시고 보여줬다.



2018년의 계획은 작심 일일 (作心一日), 하루의 성공과 364일의 실패로 막을 내렸음을 상기시키는 게시물이었다. (아주 고오오오오맙다아, 페이스북아^^????????) 이후 2019, 2020, 2021년에는 너무 바빠서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회사에서의 목표가 나의 목표인양 살아서 회사에서의 연간 계획을 내 계획인 것처럼 대했다. 내가 일을 하기보다는 일이 나를 질질 끌고 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번 해를 위해서는 4년 간의 공백을 깨고 계획이란 것을 하나 세워봤다.


매일매일 글쓰기.


그리고 나흘 째. 오늘도 퀄리티가 어쨌든 랩탑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낄낄... 내 얼굴엔 지금 보살 같은 자애로운 미소가 '낄낄'이라는 소리를 숨긴 채 퍼져나가고 있다. 나는 지금 기적을 만들고 있다! 작심일일에 그쳤던 4년 전 이맘때 대비 300% 성장한 으-른의 모양새로 작심 후 나흘 차를 즐기는 나, 저 잠시 스스로에 취해있어도 되나요? 투자를 해도 4년 만에 4배 수익 거두는 게 쉬운 건 아니거든요. 쏘 뿌듯하거든요. 글감이 없는 건지, 글감이 될만한 걸 찾아 쓰는 글 감이 없는 건지 모르겠지만 글감 없는 오늘 같은 날에도 일단 그냥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 있다니!


MBTI로 나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P(인지형, Perceiving)는 내가 가진 여러 특질 중 하나를 잘 설명하는 알파벳이다. 처음 MBTI 테스트를 했던 17살 이후, E도 N도 F도 한 번씩 나를 버렸지만 늘 내 곁을 지켰던 P는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 훌쩍 넘은 세월 동안 한 번도 바뀌지 않고 동일하게 결과지에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P적인 요소가 강한 사람들은 보통 즉흥적으로 움직이고 계획한 것도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바꾸거나 타협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뭐다? 즉, 나의 라이프스타일이다. 거기에 이제 F를 곁들이면 '상황에 맞춰'의 '상황'에 내 기분도 포함되는지라 계획을 세우고 지키는 것은 지금까지 내게는 거의 불가능한 수준의 영역이었다. 근데 그런 내가 지금 쓰고 있다니?


사실 기분이 마냥 좋진 않다. 재택근무 후 거실에서 안방으로 퇴근을 하고 저녁을 먹고 나니 나에게 주어진 <스트리트 걸스 파이터> (스걸파) 결승 마지막 화 시작 전까지 남은 시간은 두 시간 남짓이었다. (이제 한 시간 정도 남았다.) 지금 글을 쓰지 않으면 오늘은 못 쓴다고 생각하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 오늘 하고 싶었던 건 사놓고 읽지 못한 책을 읽거나 밖에 나가 잠깐 바람을 쐬거나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느라 시달린 나의 거북목과 짧아진 근육들을 늘여주는 일이었는데, 계획을 지키기 위해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스스로의 자제력이 뿌듯하긴 하지만 '계획적'이기 위해 하고 싶은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우울감도 오늘은 없잖아 있다.


극 P인간의 300% 성장에 대한 뿌듯함을 잠시 미뤄두니, 강박이 보인다. 생산적인 인간이 되고 싶은 강박. 그게 설령 똥을 생산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생산적인 인간이고 싶은 마음이 보인다. 글이 차곡차곡 쌓이고 브런치 링크의 글 번호가 차차 올라간다고 해서 당장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창작하는 활동이라는 지점에서 적당히 즐겁고 '생산적' 활동이라서 나는 올해 계획을 깨고 싶지 않은 것 같다. 나흘 째 쓰는 계획은 잘 지키고 있지만 사실 올해 1월 1일 이후 내가 집 문 밖을 나서 집 밖에서 보낸 시간은 3시간뿐이다. 그마저도 1시간은 차로 이동, 1시간은 앉아서 교회, 나머지 1시간은 다시 차로 이동하면서 보낸지라 좌/와식 생활의 정점을 찍고 있다. 하나의 계획을 세우고 그것만 잘 지킨다고 해서 이게 내가 원했던 삶의 모양새가 맞는지 갸우뚱하다.


흠...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매일매일 글쓰기'를 왜 하려고 했더라? 생산적인 인간이 되고 싶은 것이었나? 생산적인 인간이라면 무게 중심을 앞 쪽으로 옮겨 지금처럼 '매일매일' 꾸준히 해보는 쪽이 좋겠다. 하지만 풍요로운 삶을 위해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이라면, 무게 중심을 뒤 쪽으로 옮겨 '글쓰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먹은 것도 없는데 똥이라도 나올 리 없으니 책이던 글이던 음악이던 영화던 시각 예술이던 무엇이던 나를 채우는 날도 필요할 텐데, 어떤 채움은 또 그 밀도가 높아 소화하는 시간을 또 따로 갖기도 해야 할 텐데.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글이 깃든다고 움직이기도 해야 할 텐데, 엉덩이가 기억상실 증후군에 걸리면 앉아서 글 쓰는 것도 못하는 걸 텐데.


새해 작심삼일의 분기점에서 다행히 작심한 내용은 저버리지 않은 오늘이지만, 위험하다! 왜, 무엇을 위해,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는 다시 점검해볼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작심삼일은 넘긴 오늘이 점검일로 딱이다. 점검 후 같은 계획을 동일하게 유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고 해도, 수시로 점검이 필요한 건 진도율이나 달성률만은 아니니까. 비록 발생할지도 모르는 셀프 점검 후의 이상 소견 진단이 극 P인간이 달성한 최초/최고의 신년 계획 달성 업적을 스스로 어그러뜨리는 것이 된다고 해도, 삶보다 계획이 중요할 수는 없으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지혜를 모아서, 더 지혜 클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