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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졔졔 Jan 06. 2022

불안을 감추고 싶은 불안

2022.01.06

모두가 불안해하며 산다. 해가 바뀌기 전 만난 전 직장 후배도 곧 퇴사를 앞두고 불안해했다. 한창 그럴 때라고, 그래도 그 시기가 지나면 불안의 정도가 훨씬 낮아질 거라고, 너만 그런 것은 아니라고 불안에 대해 아는 척했다. 약간은 그 시기를 지나쳐 온 나는 더 이상 불안하지 않은 척도 했다.


웬걸, 개뻥이다. 사실 나도 불안해하며 산다. 근데 모두가 불안해하면서 살기 때문에 나도 그저 그런 불안해하는 사람 중 1인이 되고 싶지 않을 뿐이다. 너무 단역 같지 않은가. 불안한 인간들 투성이에서 나의 불안함은 특별한 것이 되지 못한다. 교만한 탓에 나는 여전히 특별한 사람이고 싶고, 그래서 덜 불안한 인간이고 싶다.


하지만 희망일 뿐 나도 그냥 불안해하는 사람 중 1인이 맞다. 어떤 지점에 대해서 나는 욕구와 욕망이 잔뜩 높아 그것이 채워지지 않는 만큼 아쉬워하고, 영영 채워지지 않을까 불안해한다. 물론 매슬로우 아저씨의 말처럼 욕구에도 단계가 있듯이 불안에도 종류가 있는지라 먹고 자고 싸는 것에 대한 1단계 불안들은 더 이상 나를 잠식하지 않는다. 그 정도의 내공은 쌓였다. 하지만 거주, 직업 안정성, 존경/인정 욕구, 자아실현 욕구는 채워지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2,3,4단계 불안은 여전히 내게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이 불안을 들키고 싶지 않다. 불안할지언정 불안을 사방에 흩뿌리고 싶지 않다. 우아하게 불안하고 싶다. 불안을 들키면 밑 보이는 것 같다. 내가 나를 믿지 않고 내가 나를 셀프 PR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세상에서 내가 나를 믿지 못하고 내가 나의 별로인 점을 솔직하게 까발린다는 것은 '나 잡아 드십쇼~'하는 것일까 두렵다.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야 당연히 모난 모습이나 별로인 모습들도 보이고, 안 보이고 싶어도 보일 거라 크게 상관없다. 하지만 일한 지 채 3개월이 되지 않는 수습 기간에 있는 직장인이라면? 엄청 상관있다! 일하는 맥락에서 안 지 얼마 안 된 직장 동료나 상사에게 불안해하거나 불안해 보이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내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판단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나는 잔뜩 놀란 우리 집 고양이들처럼 꼬리를, 복어처럼 볼을 부풀이고 지내고 있다. '제가 이 정도입니다.' 하는 태도로.


혼자서만 우아하게 불안하고 싶고, 불안감을 들키고 싶지 않으니 어떤 일이 주어졌을 때 "네! 보거스 말씀에 따르면 이런저런 것들을 중심으로 자료를 정리해서 전달을 해드리면 되는 것일까요?!"라고 당찬 목소리로 답한다. 실제로 해보지 않아 정말 도망가고 싶을 때에도 "해본 적이 없어서 잘 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도움 주시면 열심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남들에게 들켜도 된다고 스스로가 믿는 수준 선에서만 불안을 겸손으로 둔갑시켜 흘린다.


진짜 마음은 어떻냐고?


"네? 보거스는 너무 말씀도 빠르시고 엄청 많은 정보를 쏟아내고 계셔서 구조화를 어떻게 해서 자료를 정리해야 할지 잣도 감이 안 오는데요? 와, 제가 이거 할 수 있을지 모르겠고 한다고 해도 진짜 하기 싫어서 울면서 할 것 같은데 정말 저 이거 시키시게요?"라고 말하고 싶다.


"와, 이거 해본 적이 없는 건데 진짜 저 시키시려고요? 아니 시키시는 건 좋은데 그럼 많이 가르쳐줬으면 좋겠는데... 평가나 판단 없이 가르쳐 주실 수 있으실까요? 경력직이 이거 저거 다 물어본다고 원래 하던 일도 아닌데 이 일을 하는 과정으로 저를 테스트하실 생각이라면 정말 개 불안한 데요? 이걸로 이전에 제가 잘해왔던 영역까지 죄다 없던 일이 되고 저는 일 못하는 사람이 될까 봐... 진짜 조오올라 불안한데? 안 그러실 거져? 하, 아녜요. 뻔히 그러시겠죠. 최대한 못하는 거 안 들키고 질문도 여러 사람한테 분산해가면서 해서 어쩌다 한 번쯤 물어보는 사람으로 남을게요..."라고 말하고 싶다.


근데 안 그러려니 표현되지 않은 불안이 부채가 되어 점점 불어나는 것이 느껴진다.


그럼 뭐 못하겠는 일 안 시키면 덜 불안하냐? 일 조금 주면 덜 불안하냐?


그것도 아니다. 불안은 그냥 불안이다. 입사하고 찬찬히 하라고 배려를 해줘도 찬찬한 환경에서 소프트랜딩 하는 경험을 많이 해보지 않은 나는 불안하다. '이거, 이거, 일 안 주고 기회도 안 줘 놓고, 할 줄 아는 거 없거나 할 일 없는데 실수로 잘못 뽑았다고 나가라고 하는 거 아니야?' 생각한다. '열심히 일할 자세를 보여줘야지! 충성 충성'이라고 생각하며 원래 일을 빠르게 쳐내긴 하지만 더욱더 빠르게 쳐내고 보여주기를 한다. "저 리소스가 남으니까 스머프가 너무 바쁘신 거 같아 스머프가 하시는 일 나눠서 해도 될 것 같아요! 스머프 일 나눠주세요!"라고 말한다. 근데 사실 진짜 일 주면 어쩌나 속으론 불안하다.


열심히 일하던 동료들이 버블티가 땡긴다며 같이 나가자고 할 때 그래도 되나, 이것은 모종의 근태 테스트가 아닌가 싶어 불안한 마음으로 손톱이나 물어뜯으며 "아녜요, 저는 이거 좀 더 들여다볼게요." 한다. 속으로는 어떻게 버블티 먹을지 머릿속으로 조합 끝내 놨다. 그래 놓고 다음 날 그 동료가 또 버블티가 땡긴다며 같이 나가자고 할 때는 '이거 또 거절하면 사회성 제로, 혼자 일 열심히 하는 척하는 재수 없는 년 되기 십상이겠는데...' 싶어 "어머, 너무 좋아요! 저도 지금 막 당 당기던 참이었어요!" 한다.


조금은 쌓인 나 자신에 대한 신뢰를 담보로 자신감을 영끌해와 불안해 보이지 않는데 투자한다. 자신감 레버리지 투자를 통해 불안을 감추고 능력 있는 동료나 직원이라는 인정을 수익으로 올리고 싶다. 나에게 제일 큰 욕망, 인정 욕망! 채워지지 않으면 제일 불안한 인정 욕구! 인정이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된다고 생각하며 자라와서 일까. 레버리지는 성공하면 대박 성공의 기쁨을 안겨 주지만, 아시다시피 망하면 대박 망한다. 가지고 있던 것 그 이상으로 이자를 쳐서 갚아야 한다. 알면서도 요즘의 나는 스스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뢰를 담보로 그 이상의 자신감을 끌어다 쓰며, 커져만가는 불안이라는 커다란 구멍을 막고 있다. '이거, 성공적으로 막으면 인정이라는 달콤한 꿀이 떨어질 테고 실패하면 꿔 온 자신감에 원래 있던 자존감까지 크게 스크래치 좀 나겠는 걸?' 싶으면서도 연기를 멈출 수 없다.


근데 어제는 가장 긴밀히 함께 일하는 동료 원더를 통해 내 연기가 탄로 난 것을 알게 되었다. '네가 빨리 일하는 것은 알겠지만 가끔은 독촉하거나 답답해하는 것 같은 태도에 기분이 상하기도 했었다'라고 원더가 말했다. 당혹스러웠다. '이게 아닌데! 언제든 준비된 척, 열심히 일하려고 대기하고 있는 척하느라 그랬는데!' 나도 모르게 그것은 아니라며 불안해서인 것 같다고 속내가 툭 튀어나왔다. 그 얘길 듣더니 원더가 그런 거 같다고 하며, 실은 그래서 상사인 보거스도 졔졔가 뭘 막 너무 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고, 불안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주라고 했다고 이야기했다. 머쓱해졌다. 불안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그 결과가 겨우 "나는 볼을 부풀린 복어입니다." "나는 꼬리를 부풀린 고양이입니다." 소리치고 다닌 것밖에 되지 않았다니. 입으로는 아닌 척 온몸으로 말하고 있던 내 속내를 모두가 알면서도 모른 척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부끄러웠다. 아주 잠깐 생각이 많아졌다. 하지만 베개에 머리를 댄 순간 그대로 잠들었다.


여느 때랑 다를 것 없는 재택으로 시작하는 하루에, 어제 일이 자꾸 생각났지만 아주 조금은 홀가분했다. 덜 불안해졌다. 불안함을 들키고 싶지 않은 불안함이 소거되어 있었다. 잘하고 싶어 안달 난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 어차피 안 들키려고 해도 들킬 마음이라면 그냥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그러다 밑 보이면 "그래~ 이게 제 밑입니다~ 어떠십니까~"하기로 했다. 볼 부풀린 복어 대신, "제가 커 보였지만 사실은 바람 빼면 이만하지 말입니다?ㅋ_ㅋ 아, 이미 아셨다고요? 속으로 귀여워하고 계셨다고요?" 하는 미니 복어로 지내보려고 한다. 꼬리 부풀리고 옆으로 걷는 고양이의 모습 대신, 용감하게 냉장고 위를 올랐다가도 무서워서 못 내려올 때 애옹 애옹 나를 부르는 우리 집 막내 고양이처럼 '제가 사실 용감한 구석도 있지만 못할 때는 또 바로 포기하고 SOS 칠 거니 제발 도와주십시오! 무섭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지내보려 한다.


모든 불안이 다 없어지진 않겠지만, 불안을 숨기고 싶어 생기는 불안은 들킨 김에 내려놔봐야겠다. 또다시 나를 지키기 위해서라며 나도 모르게 볼과 꼬리에 힘 꽉 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불안을 숨기려는 불안에서는 자유로와져 보려고 한다. 스스로의 괜찮은 모습으로 인한 자신감을 넘어 스스로의 밑바닥이 보여도 괜찮다는 자존감을 또 조금씩 축적해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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