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이야기하는 법
날라, 호두, 콩떡이라는 고양이와 산다. 줄여서 이 셋을 콩날두라고 부른다. 우리는 가족이지만 엄연한 이종(異種) 동물이다. 콩날두도 내 무딘 움직임, 물에 닿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함, 듬성듬성 난 푸석한 털을 통해 내가 이종 동물이라는 것을 진작 눈치챘을 것이다. 이종 동물과 함께 살면서 맞는 기쁨의 수는 헤아릴 수 없다. 귀엽다는 빛바랜 말에 다 안 담기는 귀여움이 그 원천일 때도 많지만, 그중 가장 기쁠 때는 우리가 서로를 이해했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한 편 가장 절망감이 드는 순간도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어떤 욕구나 생각은 절대 서로에게 닿지 않으리라고, 이해시키거나 이해할 수 없다고 느끼는 때에 있다.
구강 구조 탓인지 다른 두 명의 고양이 대비 유독 치석이 잘 끼는 날라는 이를 자주 닦아야 한다. 안 그러면 언젠간 이를 몽땅 뽑아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측 가능하듯 날라는 이 닦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이 닦는 자세로 안으려는 순간부터 뒷발에 힘을 주고 내 배를 도움닫기 발판 삼아 밀어내며 도망갈 태세를 취한다.
“오이구, 우리 날라 싫었어요~ 미안해, 미안해애~ 그래도 이빨은 닦아야지요? 안 닦으면 이빨 나중에 병원에서 다 뽑아버리지요? 그럼 아프지요? 아프면 슬프지요? 맛있는 거 씹어 먹어야 되는데 이 다 뽑으면 동생들이 간식 먹을 때도 혼자서 쳐다만 봐여지요? 그러기 싫지요? 그래서 이 닦는 거예요. 어이구, 잘한다~ 거의 다 했다! 싫어도 어쩔 수가 없어요~ 우리 날라 언니가 사랑해서 그러지요? 이해해 줄 수 있지요?”
왼손으로 양 볼을 당겨 칫솔이 어금니를 닦을 수 있도록 고정시킨 채로 오른손으론 치약을 묻힌 칫솔로 잇몸을 쓸어내리며 혼자 쉴 새 없이 떠들어댄다. 물론 날라는 온 힘을 다해 나란 악당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노력을 한시도 멈추지 않는다. 자신에게 내가 자행하는 이 끔찍한 고문을 이해할 생각은 억지로 내맡긴 자신의 어금니 크기만큼도 없어 보인다.
호두는 정말 드물게 벽에 수직으로 오줌을 갈기곤 한다.
‘엥—’하고 특유의 소리를 내며 꼬리를 파르르 떠는 것이 비극의 막을 여는 신호이다. 이후 바로 뿜어지는 오줌 줄기가 벽과 만나는 각도가 정확히 90도인데 그 광경을 보고 있으면 황망함에 정신줄을 놓게 된다. 수도가 아니니 잠글 수도 없고 뿜어지는 오줌 줄기 사이로 손을 넣어 수건이나 기저귀를 채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반포대교 분수가 하늘로 솟는 형태의 분수들과 다르게 수면과 수평이 되도록 뿜어져 나온다던데, 어떤 모습일지 굳이 안 봐도 될 것 같다. 이럴 때면 말도 안 나온다.
“…왜? 어째서?”
호두는 답이 없다.
콩떡이는 가끔씩 ‘우에---우아옹---’ 길게 이어지는 소리를 낸다. 평소의 콩떡이가 내는 소리와 전혀 다른 소리인데 인간의 관점으로 듣기에 구슬프고 서러운 소리라 콩떡이가 어디가 아프거나 슬픈 것은 아닌지 마음이 덜컹 내려앉는다. 저런 소리를 낼 때면 십중팔구 내 눈앞이 아니라 내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공간에 있기 때문에 서둘러 그 소리를 따라 콩떡이를 찾으려 한다. 그렇게 찾아낸 콩떡이는 보통 나를 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소리를 그친다. 서러움을 들켜 황급히 눈물을 훔치는 비련의 드라마 주인공이 생각나 더 답답해지지만 무슨 일인지 물어도 콩떡이는 ‘이옹-?’ 하는 소리만 낼뿐이다.
그러니 이런 불통의 좌절을 손쉽게 극복하게 해 줄 문명의 이기가 나타났다는 소문에, 손가락으로 핸드폰 화면을 한달음에 내달려 앱 스토어로 달려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고양이의 목소리를 듣고 무슨 말을 하는지 인간의 언어로 번역해 준다고 하는 어플리케이션, '미야오톡'을 찾아 다운받았다. 그 뒤로 콩날두가 말을 할 때마다 그 앱을 켰다. 처음 몇 번은 신기했다. 날라가 말할 때 화면에 뜬 ‘안녕!’ 이란 말이, 호두가 말할 때 화면에 뜬 ‘배고파!’란 말이, 콩떡이가 말할 때 화면에 뜬 ‘놀아 주세요.’라는 말들이 반가웠다. 내가 생각하는 콩날두의 감정이나 상태나 생각이 맞는지 고민하는 것 대신,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즉각적으로 콩날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편리한 기쁨에 들떴다. 들뜬 마음으로 개발자를 찬양했다. 물론, 그런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여느 날처럼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하며 게으름을 피우는 내 옆으로 호두가 다가왔다
“엥—”
앱의 화면에 ‘지금 별로예요’라는 말이 떴다. 이상했다. 호두는 놀고 싶을 때 장난감을 물고 내 시야 가까이에 와선 소리를 내는 것으로 내 주의를 끈다. 그날도 호두는 전날 크라프트지를 뭉쳐 만들어준 작은 공을 물고 와선 내 발밑에 던져놓고 나를 불렀다. 그러니 지금 호두가 하고 있는 말이 밑도 끝도 없이 ‘별로예요’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호두가 내는 소리에 호두와 눈을 마주치자 호두는 앞 발로 종이 공을 툭툭 쳤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호두가 하는 말을 모른 척했더니 다시 한번 호두는 ‘엥—’ 말했다. 벽에 오줌을 싸기 직전 내는 것과 같은 소리였다. 하지만 이번엔 내 손으로 다가와 내 손에 머리 박치기를 했다. 내가 정확하게 알아듣는 호두의 몇 안 되는 말이기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호두는 ‘야, 나 좀 봐. 나 놀고 싶으니까 어제 했던 것처럼 종이 공 빨리 던져줘. 공은 여기 있어. 빨리 손으로 잡아서 던져줘’라고 말하고 있었다. 같은 ‘엥—’이지만 완전히 다른 말이다.
뻐근한 몸을 풀기 위해 바닥에 앉아 나비 자세로 골반을 열어 낸다. 좀처럼 침대 위는 올라오지 않는 날라가 창가에서 밖을 바라보다 내려와 내 옆으로 다가와 다소곳이 앉는다. 식빵 자체인 상태에서 엉덩이를 내 쪽으로 들이대곤 발뒤꿈치를 살짝 든 자세이다. 소리로 인한 공기 중의 파동은 없지만, 날라는 지금 말하고 있다.
‘나 만져… 나 엉덩이 두드려 줘…’
내가 반응이 없자 날라는 뒤를 돌아보며 왼쪽 윗입술을 들어 올려 못마땅한 듯 송곳니를 드러내 보이곤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려 엉덩이를 좀 더 치켜올린다.
‘만지라고 했지… 빨리 만져… 엉덩이 두드려… 빨리…’
어플리케이션은 이 수다스러운 날라가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말을 하긴 하냐는 듯이 모르겠다는 뻔뻔한 화면으로 묵묵부답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고양이들은 원래 목소리로 소통하지 않는다. 목소리 대신 꼬리의 모양, 귀의 모양, 몸짓과 페로몬으로 이야기하는 동물이다. 몸소리의 동물. 고양이의 말로 잘 알려진 ‘야옹’은 아기 고양이가 엄마 고양이와 얘기할 때 외엔 원래 고양이들끼리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고양이들은 많은 인간들이 소리에 기반한 소통이 익숙하다는 걸 귀신같이 눈치채고 관대하게도 이종 동물이 알아듣기 쉽도록 몸소리 대신 목소리로 대화를 청하는 것이다. 콩날두도 배가 고플 때, 놀아달라고 말하고 싶을 때, 싫다고 소리 지를 때 여러 동작과 함께 목소리를 섞어 말한다. 전혀 다른 소통 체계를 지닌 존재와 관계를 맺기 위해 콩날두는 익숙한 접근 방식보다는 상대의 방식을 시도한다. 그런데 나란 동물은 이 이종 동물의 호의를, ‘야옹’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나한테 익숙한 음성을 기반으로 간편히 소통의 벽을 해소하려 했던 것이다. 호두의 ‘엥—’처럼 소리만 들으면 제대로 콩날두의 생각을 알 수 없다. 목소리는 나를 위한 배려일 뿐 진짜 콩날두의 생각은 몸소리를 자세히 살펴야 알 수 있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요행을 부리고 싶어 모른 척하며 깔았던, 어플리케이션을 지웠다.
콩날두의 몸소리를 듣는다. 어찌나 말이 많은지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통에 시끄러워서 귀찮지만 그 속에서 나누는 얘기들로 하루가 풍성하다.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서 화장실로 향하는 나를 따라 들어와 몸을 이리저리 뒤집고 다리에 온몸을 부비는 호두의 몸소리는 호들갑스럽다.
‘네가 죽은 줄 알았는데 오늘도 이렇게 일어나니 반가워! 이젠 나랑 놀아줄 거야?’ 몸을 호떡 뒤집듯 발라당 발라당 뒤집으며 말한다.
오랜 시간의 컨퍼런스 콜을 참다못해 키보드를 꾹꾹 밟으며 내 눈과 카메라 사이를 현란하게 오가는 콩떡의 몸소리는 심통이 잔뜩 나있다.
‘너 왜 하루 종일 내 몸소리는 안 듣고 다른 목소리만 듣는 거야. 내 말은 안 들을 거야?’
무릎 위로 달려 올라와서 시선을 끌고는 나와 눈을 제대로 마주치자마자 이제 됐다는 듯이 좋아하는 습식 캔이 보관된 싱크대 하부장으로 달려가 그 앞에 다소곳이 앉아 기다리는 날라의 몸소리는 단호하다.
‘열어줘, 배고파. 밥 줘.’
나도 몸소리를 따라 한다. 햇살이 비치는 바닥에 새근거리며 자는 콩떡이 옆에 모로 누워, 립스틱을 바르고 위아래 입술을 빱빱 찍어내듯 콩떡이 귀를 살짝 문다. 턱으로 콩떡이의 뒷덜미를 콕콕 찍어본다. 호두의 몸소리를 따라 한다.
‘사랑해, 콩떡아. 편히 자, 사랑해.’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게 같은 자리에 앉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날라와 놀고 싶을 땐 앉은 자릴 박차고 일어나 금방이라도 날라를 잡아먹을 듯 날라에게 뛰어간다. 14평의 좁은 집에서 날라가 허겁지겁 뛰어가다 막다른 곳에 이르러 따라 잡힌다. 이번엔 내 차례다. 날라에게 절대 잡아먹히지 않겠다는 각오로 집의 반대편으로 진력을 다해 뛴다. 콩날두의 몸소리를 따라 한다.
‘날라, 심심했지. 잡기 놀이하자. 술래는 계속 바꿔가면서, 어쩌다 스텝이 꼬이면 어쨌든 뒤에 따라가고 있는 사람이 술래야.’
아침에 일어나 바로 화장실로 향하기 전에 침대에서 가장 가까운 스크래처를 긁는 척한다.
‘안녕, 다들 잘 잤어? 나는 잘 자고 일어났어.’
새로운 언어를 배우며 한국어로 표현되지 않던 것들이 이름이 생기기도 하는 것처럼, 더 풍성히 생각과 느낌과 상황을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콩날두의 몸소리를 배우고 따라 하고, 이해하기 위해 새로운 시도나 접근을 할수록 내 세계가 넓어지는 것을 느낀다. 사랑한다는 말로 늘 다 담을 수 없던 목소리의 세계 속 사랑을, 등을 둥글려 조용히 옆에 모로 눕는 것으로, 털은 아랑곳 않고 내 입안에 네 귀를 오물거려 넣어 따뜻이 덥히는 것으로, 몸을 낮춰 슬금슬금 기어가 내 코를 네 코에 콕 찍는 것으로 표현할 수 있구나 생각한다. 그중에 어떤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나눠도 전해질 몸소리겠구나, 콩날두가 아니었으면 배우지 못했을 온 몸을 써서 전달하는 사랑에 대한 말이겠구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