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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졔졔 May 20. 2022

0이 다른 0의 손을 움켜 잡을 때

고민실 장편 소설, <영의 자리>

4월의 어느 날, 한겨레출판 에서 한겨레출판의 서포터즈인 하니포터 를 모집한다는 글을 보았다. 하니포터로 선정되면 매달 한겨레의 신간 한 권이 온다는데 안 할 이유가 없었다. 나에게 조금이나마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게 하는 힘이 있다면 그 많은 부분을 한겨레출판에 빚져왔다 생각할만큼 한겨레출판의 책들을 열독해왔으니까. 어차피 사서 읽게 될거라면, 읽고 읽은 것에 대한 생각과 마음을 나눌 것이라면, 더더욱 신청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경쾌한 신청이었다.


아, 물론 책이 온 2주 이내에 서평을 작성해서 올려야 하는 미션이 빡빡한 현대 사회의 직장인으로 살아가며 수행하기엔 다소 버거운 날들도 있지 않을까 잠시 주저하긴 했지만 ‘안 될 수도 있으니까.’ 하며 신청했고 되어 버렸다 (!)


그렇게 4월, 한겨레출판의 신간 네 권 중 원하는 책을 신청하라는 연락이 기대감과 함께 도착했다. 아래가 도착한 책의 목록이었다. 하나 같이... 다 내 취향...


1.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분야 : 에세이) �4월 2주 출간 예정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10대 소녀가 100만 명 중 2명꼴로 갖는다는 희귀난치병을 진단받고, 병을 앓게 되며 깨달은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을 담담하고 유쾌하게 풀어낸 에세이.
아픔의 종류는 비록 다를지라도 고통을 겪고 있는 누군가에게 위로와 웃음을 전해주며 독자를 웃기고 울리는 이야기들을 담았다.

2.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분야 : 에세이)�4월 3주 출간 예정
이 책은 늙은 몸, 아픈 몸, 이동이 자유롭지 않은 몸, 인격을 빼앗긴 몸, 평가 당하는 몸 등 현대 사회에서 '자본주의적'이지 못한 약한 몸들에 관해 여성의 시선에서 써내려간 내밀한 몸 에세이다. 가난한 이, 장애인, 노인, 난민 곁에서 기록하는 일을 해왔던 작가는 언젠가부터 '늙음'과 '가난'에 대한 두려움이 자신에게도 이어졌다. 40대 여성, 경제적 하위층, 독거 중. 아직 장애는 없으나 순발력과 집중력이 떨어져가는 몸과 정신. 작가는 이 책에서 '아름다움', '부유함', '정상이라 불리는 것들'과 반대되는 추함, 가난함, 그리고 '비정상이라 불리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며 그 차별의 중심이 몸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꼬집는다.

3. 영의 자리 (분야 : 소설) �4월 3주 출간 예정

2021년 제26회 한겨레문학상 본심에서 최종 후보로 거론된 두 작품 중 하나인 소설이다. 심사 당시, "이런 문장을 쓰는 작가라면 한번 만나보고 싶다"라는 심사평을 받은 『영의 자리』는 유려하고 섬세하며 생경한 문장이 특징이다.

대학생을 지나 대학원생으로, 그리고 다시 취준생으로 지독하게 평범한 '생'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주인공은 무난하게 들어갔던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백수'로서 남은 시간을 살아간다. 《영의 자리》는 날이 갈수록 무료해지는 인생을 버텨보고자 했던 주인공이 임시방편으로 플라워약국의 아르바이트생이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담았다.

4. 끝장난 줄 알았는데 인생은 계속됐다 (분야: 에세이) �4월 4주 출간 예정

"열정과 긍정이 삶의 모토", "에너자이저"라는 소개가 따라다닐 만큼 삶에 열정과 의지가 있는, 신문사 팀장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 치열하게 살아온 40대 저자. 갑작스런 유방암 진단을 받은 뒤, 비로소 배운 내 몸과 마음, 주변 관계를 돌보는 법을 담은 솔직유쾌 감동 가득 에세이.


네 권 다 흥미로워서 고르는 것이 쉽지 않아, 하루를 넘길 때 쯤에야 계속 마음에 남던 고민실 작가의 <영의 자리>를 고를 수 있었다. 작년 6개월을 백수로 살며 백지의 시간을 즐기면서도 내심 백지로 두면 안될 것 같았던 날들이 떠올라 고른 책이었다. 실제로 택배로 받아 읽기 시작한 <영의 자리>는 그런 감각들을 솔직하고 서늘하게 그려낸다. 


작중 20대인 나는 취준 후 각 독립해 혼자의 삶을 꾸린다. 그리고 그런지 얼마 되지 않아 정리해고를 당한다. 실업급여가 나오며 여유로웠던 시절은 잠시 세차게 부딪혀오는 현실에 다시 일을 구해보려해도 쉽지 않다. 임시로 나는 플라워약국의 아르바이트생이 되기로 한다. 그리고 나와, 먼저 약국에서 일하고 있던 또 다른 '유령'인 나의 사수 '조'와, 그리고 이 둘을 유령 취급하는 심드렁한 '김 약사'와 산 듯 죽은 듯한 일상을 공유한다. 청소, 약 이름 외우기, 발주넣기, 식빵 사다 놓기 등 유령이 할 수 있는 정도의 일을 하루 하루 수행하며.


이 소설엔 특별한, 혹은 잔뜩 자극적인 에피소드 같은 것은 없다. 그저 유령같이 살아가는 도시인들만 약국이라는 공간의 문을 두드리고, 나가곤 할 뿐이다. 그래서 더욱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스스로를 느끼는 인물들과, 그 인물들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활자로 좇는 내 아무 것도 아님이 갑갑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살려고, 잘 살려고, 나름대로 늘 부단히 노력해왔는데, 일인 분의 몫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어쩐 일인지 0.1 ver, 0.2 ver, 0.3 ver. 정도의 몫만 해내는 것 같은 갑갑함. 이제 최종 버전의 나를 빚어냈다 싶을 때 다시 파일명만 바뀌고 0.1 ver, 0.2 ver을 반복하고 말아 버리는, 설령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런 생각이 자주 드는 날들을 이야기하는 소설이었다. 0으로 비유하는 허탈함이 영(靈)하고도 닿아, 1인분이 되지 못하고 영의 세계에 너무 오래 남은 나머지 유령이 된 (것 같은) 사람들을 찾는 성실한 매일의 고단함을 그리는 소설이었다.


새로운 취향을 만드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조는 노력이 유발하는 피로를 감당할 여력이 없어 보였다. 나도 요즘 무거운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지난 몇 해를 훨씬 바쁘게 살았는데 그대보다 더 지치는 기분이었다.
(p.097)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까지 관계는 생물학적 존재를 필요로 했다. 이제는 생물학적 존재를 정의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형성된 관계가 필요하다. 산만한 세상에 흩어진 자아의 파편은 쉽게 휩쓸리거나 왜곡되었다. 먼지처럼 하찮은 존재감에 서글퍼질 때면 바다를 보고 싶었다.
(p.114)


여름 날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고 에어컨이 켜진 장소로 들어갈 때 오소소 돋는 추위와 같은, 매서운 한 겨울의 추위보다는 사소하대도 결고 쉬이 넘길 수 없는 서늘한 마음과, 아무리 애써도 티나지 않는 매일 매일의 수고들.


경계선만큼 유동적인 세상도 없다. 아무리 잔잔한 수면이라도 물과 광기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증발과 응결이 일어난다. 물 분자가 치열하게 움직인 결과가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수면이다.
(p.148)


다만 작가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끝까지, 끝까지 갑갑할까 싶은데 자극적인 에피소드 하나 없이 작중 나는 다시 0에서 1로 찬찬히 다가선다. 이 서늘한 마음들을 모아, 0이 가장 어울리는 자리를 찾아, 서로를 기대 놓고 무한(00)의 가능성을 만들 수도 있지 않냐고 말한다. 표지의 디자인도 0의 빛나는 가능성을 숨기지 않는다.


0이라고 느껴지는 날, 다른 0의 손을 꽉 움켜잡으면 무한의 힘이 솟을지 모른다는 사소한 희망이 내려 앉는다. 문득, 약국에서 아르바이트 했던 기억을 글로 남겼던 또 다른 한 0의 안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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