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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진 Jan 13. 2019

밤만큼 아름다운 겔레르트 언덕

이제 더 이상 떠남이 두렵지 않은 여행자가 보내는 열두 번째 러브레터

@겔레르트 언덕, 헝가리 부다페스트


타지에서는 한국인만 보면 말을 걸게 된다

부다페스트에서 단 하루만 머무르게 된 저는 여러 야경 스팟을 한 번에 들를 수 있는 '야경 투어'를 신청해뒀습니다. 밤에 모든 명소를 방문하게 되니 오히려 낮 시간이 여유롭더라고요. 낮에 어딜 갈까 고민하던 차에 그래도 낮 시간의 부다페스트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답은, 겔레르트 언덕이었죠. 말이 길이지 거의 등산로지만 그래도 용기 내어 도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겔레르트 언덕으로 향하는 길, 자유의 다리에서 보는 풍경이 예뻐 그 배경으로 제 사진을 찍고 싶었는데 각도가 애매해 계속 사진에 셀카봉이 나오는 겁니다. 외국인에게 사진을 부탁했다가는 여행 마지막 날 핸드폰을 도난당할 것 같아 지나가는 한국인 여자분을 급하게 붙잡았습니다. 


"저... 사진 좀 찍어주세요"



그렇게 완성된 다리 위의 인증샷. 촬영 후 그 분과 어색하게 다리를 건너며 이후 여행 일정을 주고받았습니다. 겔레르트 언덕을 올라가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분은 어제 어부의 요새부터 겔레르트까지 걸어가 봤는데 정말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분은 파이팅을 외치며 트램 타러 떠나시고 저는 횡단보도를 앞에 서 있었습니다. 신호를 기다리기 한참, 누군가 제 등을 갑자기 두드리는 겁니다. 바로 아까 그분이었습니다. 낮의 겔레르트가 궁금하다며 같이 올라가도 될지 물어보시러 오신 거죠. 이렇게 저희는 만난 지 오 분 만에 함께 겔레르트 언덕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밤만큼 아름다운 부다페스트의 낮

숨을 헐떡이며 올라가다 멈추기를 수차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을 때쯤 겔레르트 언덕에 도착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기 위해 지금까지 살았나 싶을 만큼, 탁 트인 부다페스트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부다페스트는 밤이 아름다운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낮 또한 이처럼 아름답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오히려 힘들게 걸어 올라가 마침내 만난 성취감도 있었던 것 같아요. 같이 올라온 동행 분은 저녁 일정 탓에 먼저 내려가시고 저는 혼자 남아 이 풍경을 조금 더 눈에 담았습니다.


카메라 브랜드를 홍보했던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고백하건대 모든 풍경은 눈으로 보는 게 제일 예쁩니다. 그 어떤 좋은 카메라로 찍은 사진도 실물로 마주했을 때의 그 감동을 못 따라가니까요. 여행 내내 본 풍경과 감정을 눈으로 머리로 마음으로 열심히 기억하려 노력했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 이제 그 감동이 조금씩 잊혀 가 아쉬울 따름입니다. 뭐 어때요, 까짓꺼 이 핑계로 한 번 더 가면 되죠.



겔레르트 언덕에서 써 내려간 이야기

부다페스트에서의 하루는 제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어디든 갈 데 없겠어라며 호기롭게 회사를 때려치웠지만 여행 마지막 날이 되니 나이 서른에 이제 한국에 돌아가면 백수라는 현실에 다시금 마주하게 됐죠. 엄마, 나 어쩌지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이런 날 다시 써줄 회사가 있을까, 나는 무엇을 잘하나. 그리고 항상 머릿속을 맴도는 바로 그 고민 "난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출국일을 앞두고 약간은 울적한 기분에 젖어 있었는데, 겔레르트 언덕에서부터 땀을 식히면서 내려오다 보니 한결 개운해졌습니다. 몸에 열을 내며 힘들게 올라가 땀을 식히며 여유롭게 내려오는 등산의 특성이겠죠. 울렁이던 기분이 가라앉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차올랐습니다.


퇴사 후 유럽을 떠도는 이가 저뿐인 줄 알았는데 현지에 가보니 꽤 많은 이들이 저와 같은 사연으로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다들 즐겁게 여행을 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무거운 돌덩이가 있는 기분이겠죠. 


취업, 이직, 결혼 등 어깨를 짓누르는 고민을 하나쯤 갖고 계신 여행객이시라면 겔레르트 언덕에 올라가실 것을 추천드립니다. 돌덩이를 안고 힘겹게 올라가야겠지만 대신 정상에 모든 고민과 짐을 놓고 내려오실 수 있어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요.


귀국 후 다시금 마주할 현실이 두려워 마음 편히 여행을 즐기지 못할 저와 같은 방랑자들에게

괜찮아!라는 한 마디를 건네며 여행자 김수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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