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더 이상 떠남이 두렵지 않은 여행자가 보내는 다섯 번째 러브레터
@까를교, 체코 프라하
고백하건대 저는 차가운 도시 불빛을 사랑하는 여행자입니다. 상해의 '와이탄', 홍콩의 '빅토리아 피크', 다낭의 '노보텔 호텔 스카이라운지', 대만의 '타이베이 101' 등 크고 높은 건물들이 뿜어내는 색색의 전기 불빛을 쫓아다니죠. 도시 야경을 보고 있자면 화려한 이 도시의 정가운데 서 있는 기분에 휩싸여 언제나 가슴이 쿵쾅거립니다.
프라하의 밤은 유럽의 3대 야경으로 손꼽힙니다. 프라하성, 까를교 등 오랜 역사를 가진 관광지들이 예쁜 조명을 만나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랑하죠. 하지만 제가 오늘 여러분께 소개하려는 건 밤보다 아름다운 해 질 녘의 프라하입니다. 누군가 저에게 프라하의 야경 명소를 묻는다면, 저는 어느 곳을 걷든 상관없지만 꼭 해 질 녘부터 나오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프라하의 해는 핑크빛으로 지거든요.
프라하에서는 굳이 트램이나 메트로를 이용할 필요가 없어요. 도시가 크지 않고 각종 관광지와 볼거리들이 모여 있어 도보로 시내 관광이 가능하거든요. 게다가 동유럽 현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소담스러운 가게나 주택들이 골목 사이사이에 숨겨져 있어 트램을 타고 스르륵 지나갔다가는 이런 사소한 즐거움들을 놓치기 십상이에요. 저와 함께 야경을 즐길 준비가 되셨다면 얇은 재킷과 야경을 담을 스마트폰(또는 카메라)을 들고 바츨라프 광장에서 만나요. 참, 야경이랑 어울리는 음악도 하나 있으면 좋겠네요.
바츨라프 광장에서 프라하 국립 박물관을 등지고 구시가지 광장을 향해 걸어갑니다. 어느덧 한적해진 거리를 걷다 보면 저 길 끝에서부터 해가 지는 게 보여요. 구름 주변이 핑크빛으로 물드는 게 보이시나요? 밝았던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면 해 주변부터 핑크빛으로, 보랏빛으로, 짙은 청색으로 물들어 갑니다. 지금 프라하의 밤이 오고 있나 봐요.
그거 봐요, 제가 재킷을 꼭 들고 와야 된댔죠? 구시가지 광장에 도착하니 벌써 하늘이 제가 사랑하는 짙은 청색으로 뒤덮였어요. 이때쯤 되면 따뜻한 낮과 비교할 수 없게 쌀쌀해지거든요. 눈이 시리도록 새파랗지만 따뜻한 짙은 청색 하늘을 보고 있자니 조금 더 걷고 싶어 졌어요. 이제 까를교 쪽으로 걸어갈래요?
까를교에 다다르니 하늘이 완전히 깜깜해졌어요. 저 멀리 프라하의 명물, 프라하 성이 보입니다. 낮에 본 프라하성은 고즈넉한 고(古)성이었는데, 밤에 만난 프라하성에는 디즈니 공주님들이 살고 있을 것 같아요. 저 뾰족한 첨탑 아래에는 '미녀와 야수'의 벨이 계단을 오르고 있고, 오른쪽 성 초입에는 '신데렐라'의 호박 마차가 달릴 준비를 할 것 같아요. 성이 잘 보이게 사진을 한 장 찍어주세요. 바람이 거세 머리가 엉망이 됐지만 뭐 어때요? 더 후련하고 자유로워 보이잖아요.
야경을 충분히 봤다면 이제 숙소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요, 우리.
가는 동안 심심한데 제 이야기를 들어주실래요?
저는 작년 여름까지 광화문역 부근의 한 홍보 회사를 다녔어요. 성기게 엮은 철 망에 크기가 서로 다른 돌을 채워 넣은 돌담부터 매주 화요일엔 플리 마켓이 열리는 작은 미술관, 오래됐지만 정겨운 물건들로 가득한 역사박물관을 매일 아침 출근 길마다 지나쳤죠. 연이은 미팅에 말을 너무 많이 한 날에는 점심 한 끼를 거르고 정동 길 근처를 산책하곤 했습니다.
저희 회사가 위치한 건물 옥상에 올라서면 도로 저 끝으로 해가 넘어가는 게 보였어요. 해가 스르륵 지기 시작할 때쯤 옥상에 올라가면 주황빛으로 잠시 물들었다가 금세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덮이는 찰나의 하늘을 만나게 되죠. 퇴근 직전의 겨우 십분 남짓한 이 시간은 옥상에 자주 올라오는 저만 아는 이 도시의 매력이었습니다. 마음이 힘들 때면 그 옥상에 서서 욕도 하고, 울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소리도 질렀는데, 도시 빌딩 숲 누군가는 저의 외침을 들었을까요.
지구는 둥글다잖아요. 해는 어디서나 뜨고 지구요. 문과생인지라 하루 종일 해가 지지 않는 백야 등의 예외는 무시해볼게요, 하하. 제가 지금 여기서 보고 있는 이 해 질 녘의 어스름한 빛을 지구 반대편의, 그리고 제가 머물렀던 광화문의 또 다른 개미도 보았겠죠? 그럼 반대로 제가 옥상에서 본 매일의 해 질 녘도 이 곳에서 마주한 햇빛과 같았겠네요. 이 생각이 들자 이유 없이 웃음이 났어요. 프라하의 해 질 녘을 보러 오게 된 건 어쩌면 운명인 것 같아서요.
서울 빌딩 숲에서 가끔 온기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해 질 녘 즈음 옥상으로 올라오세요. 오늘 만난 프라하의 온기를 비행기로 12시간 넘게 가야 하는 그곳에서도 느낄 수 있으니까요. 다만, 해 질 녘에 옆 건물 옥상에서 하늘을 보고 있는 또 다른 '우리'를 만난다면 서로 못 본 척해주기로 해요. 하지만 어떤 마음일지 서로 알고 있으니 말 없이 응원합시다.
숨구멍을 찾아 옥상으로 올라올 빌딩 숲 개미들에게
프라하의 해질녘 온기를 전하며 여행자 김수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