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더 이상 떠남이 두렵지 않은 여행자가 보내는 일곱 번째 러브레터
@필스너우르켈 맥주 공장, 체코 플젠
프라하 시내에서 길을 물을 때마다 들은 말이 있습니다. 제가 외국인인걸 알곤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확인한 후 대뜸 이렇게 묻더라고요.
"체코 맥주 맛있지? 독일 맥주랑 차원이 다르지?"
'필스너 우르켈' 등 전 세계가 사랑하는 다양한 맥주 브랜드를 보유한 국가답게, 자국 맥주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거죠. 제가 '진짜 맛있다'라고 대답하면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랑을 이어갑니다. 프라하 시내에 코젤 다크 생맥주를 맛볼 수 있는 식당이 몇 개나 있는지, 기차를 타고 조금만 가면 필스너 우르켈 맥주 공장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묻지도 않은 자국 맥주 자랑을 한참 듣다 보면, 이들이 얼마나 순수하게 맥주를 사랑하는지 느껴져 웃음이 터집니다.
식당에 들어가 주변 테이블을 둘러보면 어린아이를 제외한 그 누구도 탄산음료를 시키지 않습니다. 스프라이트나 콜라 등 일반 탄산음료가 맥주 한 잔보다 비싼 것도 한몫하겠죠. 덕분에 체코의 1인당 맥주 소비량은 인당 149리터 정도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다고 합니다.
저는 술을 잘 마시진 못하지만 누구나를 친구로 만드는 '알딸딸한 취기'를 사랑하는 여자이기에, 프라하에서의 3박 4일 내내 맥주를 마시고 발랐습니다. 제가 경험한 달짝지근한 맥주의 맛과 향을 잠시 즐겨보실까요?
스트라호프 수도원에서 인생 다크 비어를 만났습니다. 최근 한국에서는 글라스 테두리에 흑설탕과 시나몬 가루를 뿌려 마시는 코젤 다크가 유행인데요. 시나몬 향과 흑맥주 특유의 탄내, 여기에 흑설탕의 달콤함이 섞여 오묘한 맛을 자아냅니다. 특이하게도 스트라호프 수도원의 다크 비어는 흑설탕 없이도 달짝지근한 맛을 자랑합니다. 부드러운 목 넘김을 즐기며 다크 비어 한 잔을 비워내면, 흑맥주 특유의 콤콤한 탄 내가 입 안과 코 끝을 기분 좋게 맴돕니다. 안주로는 수도원에서 제조한 맥주를 부어가며 구운 꼴레뇨를 추천해요. 부드럽고 촉촉할 뿐만 아니라 소스의 맛이 진하지 않아 맥주 본연의 맛과 향을 온전히 즐길 수 있거든요.
플젠에 위치한 필스너 우르켈 맥주 공장에서 맛 본 생맥주는 단연 최고의 맛이었어요. 시중에서 맛볼 수 있는 필스너 우르켈 캔 맥주보다 홉 비율이 높아 입천장을 강타하는 강한 맥주의 맛을 즐길 수 있거든요. 무엇보다 전 공정이 자동화된 지금도 필스너 우르켈의 오리지널리티를 잃지 않기 위해 전통적인 양조 방식을 남겨두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초심을 유지하는 이른바 '장인정신'이 지금의 필스너 우르켈을 만든 거겠죠?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의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 즐겼다는 맥주 목욕, 저도 한번 체험해보았습니다. 뜨끈하게 데워진 맥주와 홉 가루가 커다란 나무 욕조 가득 담겨 있는데, 스파실 가득 퍼지는 진한 홉 향에 이미 취한 기분이었죠. 욕조에 몸을 담그는 동안 왼쪽에 설치된 호스를 통해 무제한의 맥주를 즐길 수 있는 점도 맥주 마니아들을 열광케 하는 또 하나의 포인트입니다. 스파 후 홉 성분이 충분히 흡수되기 위해선 반나절 이상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니 물 샤워 대신 톡톡 두드려 말려주세요. 먹지 마세요, 피부에 양보하세요!
이처럼 프라하를 비롯한 체코 도시 곳곳에 맥주를 향한 체코인들의 애정과 자부심이 묻어납니다. 내심 부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우리는 과연 무슨 민족일까요? (배달의 민족이라는 답변 금지!) 외국인 친구들이 추천 여행지를 물을 때마다 기계적으로 경복궁이나 명동이라 대답했어요. 물론 제가 추천한 곳들이 한국의 전통과 현대를 골고루 즐길 수 있는 좋은 관광 코스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체코인들에게 맥주가 있고, 헝가리인들에게 부다페스트의 야경이 있듯이 저희 스스로가 한국인으로서 열광하고 있는 '한국의 것'은 무엇일까요? 단순히 길을 묻는 저를 붙잡고 묻지도 않은 맥주 자랑을 줄줄이 내뱉을 만큼 맥주를 사랑하는 체코인들처럼 우리도 관광객들에게 자부심 넘치게 이야기할 만한 무언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한국이 가장 낯설 한국인 여행자들에게
우리는 어떤 민족인가요? 라는 새로운 질문을 던지며 여행자 김수진 올림